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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Feb 14. 2018

여행자의 무게

장기 배낭여행에 대한 몇 가지 생각


환상

긴 배낭여행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매일 아침 낯선 곳에서 눈을 뜨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처음 들어보는 음식을 먹고, 그런 특별한 날들이 일상이 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여름휴가 일주일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최소 한 달은 되어야 한 도시에서 일주일씩 여유도 부려보고, 동네 사람들도 사귀어보고 하지 않겠나 싶었다.








여행 속 일상

여행이 길어질수록 시간의 개념이 조금씩 달라진다. 내 일상과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매일을 보내고 있는데, 사실 그 안에서도 일상은 계속된다. 치약이나 로션이 다 떨어졌을 때. 어느새 길게 자라난 손톱을 깎아야 할 때. 푸석해진 머릿결을 발견하고 슈퍼에서 그나마 익숙한 브랜드의 트리트먼트를 찾아내야 할 때. 제때 빨래를 할 수 없어 냄새나는 빨랫감을 이고지고 다녀야 할 때. 분명 새로운 숙소에 도착했는데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처럼 초토화시키는 데 5분도 안 걸릴 때.









여행자의 삶

불편하긴 한데,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을 직접 해먹는 게 귀찮을 때면 조식을 주는 호텔에 묵고, 샴푸나 비누도 큰 거 살 필요 없이 좀 좋은 호텔에서 주는 어매니티를 잘 모아두었다가 쓰고 바로 버리고, 빨랫감이 쌓이면 세탁기가 있는 아파트를 찾아 묵고. 옷이 필요할 때 그 도시에서 사서 입고, 짐이 넘쳐나면 조금 덜어내기도 하고, 다 읽은 책은 게스트하우스에 기증하고……. 내가 질 수 있는 짐의 무게를 알고, 딱 그만큼만 소유하는 삶. 






자유롭지 않아

짐을 싸고 푸는 일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한정된 내 그릇에 필요 이상의 것을 우겨넣는 비루한 욕심과 맞닥뜨리는 기분이 들어서다. 버릴까, 말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물건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짐이란 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부담이 되는 존재다. 생각해봐라. 짐을 싸는 일도, 짐을 푸는 일도, 짐을 메고 이동하는 일도, 어딘가에 짐을 맡겨야 하는 일도 모두 성가시기 이를 데 없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나의 몸은 언제나 저 짐덩어리에 매여 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육체는 지치고 짐은 짐스러워진다. 



  





긴 여행의 그림자

짧은 여행을 할 때는 그런 단계까지 가기 전에 여행이 끝난다.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인 걸까. 짐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긍정적인 걸까. 여행 초반까지는, 그러니까 육체가 지치기 전까지는 여행자는 자신의 짐과 물아일체의 상태일 수 있다. 여행이 길어지면 그게 안 된다. 저 짐은 내가 아닌데, 나와 너무 오래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여행의 끝

여행을 하다가 모든 짐을 잃어버린 여행자를 본 적이 있다. 인도에서였나, 유럽에서였나. 오래 여행을 하던 이였다. 짐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의 모든 여행은 끝났다. 여권과 비행기표까지 잃어버려 같은 한국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주어 차비를 마련해 도시까지 갈 수 있었고, 대사관의 도움으로 한국에 돌아갈 수 있었다. 긴 시간, 무거운 짐을 이고지고 다닐 때 이걸 잃어버리면 모든 여행이 끝난다는 생각을 그도 했을까. 





무게감의 의미

우리가 긴 여행에서 배우는 건 결국 그런 거다. 삶의 어떤 순간에도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 아무리 무겁더라도 자신의 짐을 책임지는 자세 같은 것. 그것을 잃었을 때 감당하는 것 또한 오롯이 자신의 몫. 그리하여 달이 몇 번이고 차올랐다 사그라지는 시간, 눈부신 여행의 시간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등 뒤에 얹힌 무겁고 낡은 배낭이 든든한 전우처럼 여겨진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여행은 의미를 얻는다. 




  






홍아미

여행 에세이스트. <지금, 우리, 남미> 저자. 20살 홀로 떠난 인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25개국 100여 개 도시를 누빈 중증의 여행중독자, 라고 하지만 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하는 30대 여자입니다. 거창한 세계일주도, 럭셔리 여행도 아닌, 그저 일상 속에 내가 원하는 여행을 녹이는 법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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