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가 사는 세상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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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명절, 집에 다녀왔다. 보수적이기로 세계 최강인 아버지의 남존여비 철학 강의는 고리타분하다 못해 구린내가 났다. 어머니는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도 늘 공공연하게 모욕과 핀잔을 들어야 하는 가부장제의 볼모였고, 모든 구성원들은 서열에 복종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여자가 어딜 목소리를 높이냐’, ‘누구를 꼬시려고 이 집에 왔냐’고 언성을 높이는, 이 작은 왕국의 수호자였다.
지긋지긋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24시간도 안되어 짐을 다시 꾸렸다. 세상은 이렇게나 변했는데, 도대체 이 집구석은 예전 그대로인가. 한숨이 났다. 부조리의 집합체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는 가족, 친척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진짜 즐거워? 아무렇지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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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아무렇지 않은 적 없었다. 어렸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내게 세상은 무겁고도 무서운 것이어서 유년기의 나는 늘 어둡고 쪼그라들었다. 무서운 아빠, 야단만 치는 할머니, 고된 시집살이에 목소리를 잃은 엄마, 그리고 기고만장한 남동생. 나와 두 살 터울인 남동생은 똑똑하고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 성격도 밝았고 친구도 많았다. 전교 1등만 도맡더니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평범한 나는 남동생의 우수함을 설명하기 위한 비교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궁금했다. 똑같은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가 똑같은 가정에서 함께 자라났는데 왜 이렇게 능력도, 성격도, 성취도도 다른가. 다른 건 딱 한 가지였다. 그 앤 남자고, 난 여자라는 것. 여자와 남자가 사는 세상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그땐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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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계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안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아주 오랜 기간, 나에게 독서는 현실도피적 성격이 짙었는데, 책 속에 있는 그 새로운 세계는 그야말로 내게 한줄기 희망이었다. 한창 상상력이 피어오를 때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공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앉아있는 책상과 의자가 둥실 떠올라 지붕이 열리고 네버랜드 같은 환상의 세계로 날아가는 꿈이라든지, 찬물에 걸레를 빨고 있으면 갑자기 대문이 열리고, 왕자님 같은 멋진 남자가 뛰어들어와 나를 구원해주는 꿈이라든지. 문자로 적고 보니 우습지만, 그때는 간절했다고. 그런 공상이 일상이고 보니,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문창과에 가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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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다른 세상을 꿈꿨던 나는 어른이 되자마자 해외 배낭여행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첫 여행으로 알게 되었다. 여행이야말로 내가 사는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나의 통념과 사고 구조를 완전히 바꾸게 만든 인도, 수준 높은 문화예술, 에티켓, 생활양식 등이 뭔지 알게 해 준 유럽, 더욱 넓고 다양한 미식의 세계와 즐거움을 맛보게 해 준 동남아시아.... 나는 그렇게 여행에 중독되어갔다. 내가 사는 곳은 아시아 대륙 가장자리에 붙은 작은 나라, 별 볼일 없는 평범한 도시.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여유가 생겼다. 마음이 넓어지고, 사람을 대할 때도 너그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소설가가 되지 못한 건 여행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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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의 제목은 ‘여자의 여행’이다. 해외여행을 하다 우연히 마주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더욱 여행에 대한 열망과 간절함이 더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고.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그럼 나의 여행을 정리해 보면 알 수 있겠네’ 싶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사는 세상은 너무너무 좁다. 고개를 들기도, 숨 쉬기도 힘들 정도로. 어느 세계인들 여성의 위치가 남자보다 더 높겠냐마는, 적어도 내가 사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든다.
한국의 가장 큰 명절, 가족과 함께 하는 그 아름다운 시간에 나의 이런 생각들이 너무 불순할지 몰라도, 한숨 나오는 촌극 정도로 여겨지는 건 이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우리 어머니, 또 다른 여성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들이 유리천장 아래서 질식하지 않길, 바깥세상의 다른 공기를 맡고 새로운 숨을 쉴 수 있길. 그리하여 언젠가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부지런히 드나들게 되면, 유리천장 아래 내 작은 세계도 아주 조금은 변화할 날이 오겠지.
홍아미
여행 에세이스트. <지금, 우리, 남미> 저자. 20살 홀로 떠난 인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25개국 100여 개 도시를 누빈 중증의 여행중독자, 라고 하지만 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하는 30대 여자입니다. 거창한 세계일주도, 럭셔리 여행도 아닌, 그저 일상 속에 내가 원하는 여행을 녹이는 법을 연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