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살아있음을 포기하지 않을 우리 모두를 위하여
어느 날, 당신의 소식을 들었어요.
아무렇지 않은 보통의 날들 가운데, 당신의 소식은 벼락같은 뉴스로 다가왔죠.
“볼리비아서 40대 한국 여성 시신발견…사인은 자상으로 확인”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약한 여자와 아이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가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삶은 그렇게 한 줄로 정리되었어요. 어쩌면 내게도 ‘아이고, 저런 끔찍한 일이’ 혀 한번 차고 넘어갈 일이었는지도 몰라요. 당신이 성폭행당하고 살해당한 그곳이 내가 지구 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곳, 티티카카 호수의 ‘태양의 섬’이 아니었다면요.
당신이 남처럼 느껴지지가 않았어요. 나의 다른 한 부분이 살해당한 것 같은 아픔 때문에 그 날 하루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죠. 이 이상한 마음을, 억울함에 가까운 슬픔을 나 스스로도 납득할 수가 없어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어요.
내가 생의 환희를 느끼며, 평소엔 믿지도 않던 신께 감사하며 걸었던 그 길을 당신도 걸었나요? 짙푸른 하늘이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고, 흰 구름이 당신을 따라 노래하던가요? 푸른 초원에 드문드문 풀을 뜯던 노새들이 문득 슬픈 눈으로 티티카카 호수를 바라볼 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나요?
그 모든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해지자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래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슨 마음으로 홀로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갔는지. 나와 내 친구들처럼 당신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도 당신을 걱정하고 그건 위험한 여행이라고 만류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서른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또 버스를 타고 배를 타고 해발 3800미터의 호수 한가운데를 향해 당신은 다가갔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그곳으로 불렀나요.
나는 당신의 죽음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요. 태양의섬을 찬양하는 에세이를 써서 책으로도 내고, 잡지에도 실었죠. 눈부신 하늘빛, 하늘에 맞닿은 티티카카 호수, 초원의 노새들, 순박한 아이마라 원주민들의 사진을 그럴듯하게 찍어 SNS에 올리고 사람들의 찬사를 즐겼어요. 어쩌면 당신도 가기 전에 나의 낯간지러운 여행 에세이를 읽었을지도 몰라요. 이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여자 혼자 여행하는 건 미친 짓이야. 이 여행을 가면 당신 죽을지도 몰라.”
만약 누군가가 이 결과를 알고서, 시간을 되돌려 당신 앞을 막아선다면 과연 당신을 막을 수 있을까요? 저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 여자 혼자 여행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집에 콕 박혀있어야지.’ 이렇게 생각을 바꿀 수 있었겠어요? 모르긴 몰라도 콧방귀를 뀌었을 거예요. 불쾌함과 찜찜함만 더했겠죠. 여자 혼자 여행하면 위험한 걸 누가 몰라. 한국에서도 살해당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반발심만 더 커졌을지도 몰라요.
환상적인 트레킹을 마무리하고 유마니 마을에 숙소를 잡은 뒤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태양의 섬에서 하룻밤 묵기로 정한 건 정말 잘한 일이야. 그 환상적인 저녁 놀빛을 나는 알거든요. 황금빛의 태양이 호수 뒤로 넘어갈 때 눈을 지그시 감으면 이곳이 천국인가 싶죠. 눈을 뜨면 천국이 정말 거기 있어요. 그 바람의 온도, 묵묵히 나의 오카리나 소리를 들어주던 나귀들, 품이 넓은 바다 같던 티티카카 호수의 고요함...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이렇게나 생생한 걸요.
그러나 어디에나 짐승은 있기 마련이죠. 어둠이 내린 후, 문명 세계의 밖에서 본능만이 지배하는 악인을 만날 확률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클지도 몰라요. 그저 외면하고 싶을 뿐.
여자의 여행에서, 아니, 여자의 삶에서 우리가 피식자(被食者)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의 명징함과 충격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문명인의 교양에 기대고, 현대 사법 체계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다가, 아주 잠깐 그 경계에 섰을 때. 우리는 그저 행운을 바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죠.
당신과 나의 차이는 단지 그뿐입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엄청나게 나쁜 일을 당할 수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 흔적도 없이 죽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요. 잘 알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쩌라고?
약한 여자이기 이전에, 우리는 존엄한 인간입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더 많은 것을 보고 싶고,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은, 우리도 남자들과 똑같은 인간이잖아요.
그래서 당신의 죽음이 진심으로 슬프고 안타깝지만, 세상의 그 무엇도, 당신을 막을 수 없었을 거예요. 비록 그 앞에 끔찍한 죽음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죽기 직전까지는 어찌 되었건 우리는 살아야 하니까요. 나무가 살아있는 동안 더 깊이 뿌리를 박고, 더 높이 가지를 내듯, 우리도 사는 동안 더 높아지고 깊어져야 하는 인간이니까요.
죽을 때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의 뉴스는 당신의 죽음만을 이야기하지만, 당신은 분명 멋진 삶을 살아낸 여성이었을 거예요. 그 죽음이, 선정적인 뉴스가 당신의 삶을 더럽힐 수 없어요. 당신을 존경합니다.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을 멈출 수 없는, 당신을 닮은 한 여자가
글, 사진 | 홍아미
여행 에세이스트. <지금, 우리, 남미> 저자. 20살 홀로 떠난 인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25개국 100여 개 도시를 누빈 중증의 여행중독자, 라고 하지만 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하는 30대 여자입니다. 거창한 세계일주도, 럭셔리 여행도 아닌, 그저 일상 속에 내가 원하는 여행을 녹이는 법을 연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