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곳

여행 중독의 시작점, 공항의 추억

by 홍아미


문득 홀로 떠났던 내 생애 첫 여행의 몇 장면들이 떠오른다. 으스스한 바람이 부는 컴컴한 새벽, 불이 환하게 켜진 거인 같은 공항, 이륙 시간을 알리는 낯선 언어들, 그리고 한껏 들뜰 준비를 마친 마음 한 구석을 꾹 눌러주는 묵직한 여행가방……. 그 안에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도로 가고야 말겠다며 막무가내로 고집부리던 철없던 스무 살의 내 모습도 있다. 못 말리는 딸의 고집에 못 이겨 공항까지 데려다 주신 아버지는 끝내 화를 내며 뒤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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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은 내 앞에 생전 처음 보는 공항이 위용을 드러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위압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12월의 새벽,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나는 조금 무서워 보이는 공항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알파벳과 숫자가 크게 쓰인 수많은 창구들, 무엇을 기다리는지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들. 그 안에서 나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혼자 입국 수속을 밟았다. 그리고는 혹여 누가 건드릴 세라 배낭을 품 안에 꼭 끌어안고 그렇게 앉아있었다. 불안하고, 막연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 강렬한 느낌이 이후 나를 여행 중독에 빠져들게 만든 시초였음을, 그땐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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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안에서는 수없이 많은 만남과 이별이 존재한다. 떠남과 돌아옴, 기쁨과 슬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그 상반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몸을 맡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 그 감정의 격차는 이제 곧 다른 세계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떠나기 전에 만나게 되는 일종의 관문과도 비슷하다.

살다 보면, 그렇게 인생의 육중한 문 하나를 열어젖히는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곤 한다. 내게는 그때가 그랬다. 그렇게 떠난 인도에서 나는 평생 함께할 친구들을 만났고,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의 참맛을 알았으며, 진짜 내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 행복을 알고서야 어두운 공항에서 홀로 보냈던 외롭고 무거운 시간, 떠나기 전의 불안함과 두려움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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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 년간 수많은 여행을 해왔지만 지금도 공항에 가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다. 물론 첫 여행 때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륙 시간을 기다리는 순간만큼은 왠지 모르게 머리가 뜨거워지며 흥분이 되곤 한다. 다른 세계로 날아가는 시작의 순간, 어쩌면 그 시간이야말로 여행의 과정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닐까.

어쩌면 여행뿐만이 아닐 것이다. 인생을 통틀어 그런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는 순간이 어디 흔한가.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심장의 존재를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 무슨 일이 눈앞에 벌어지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 황홀함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재미없는 하루하루를 기어코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아니, 반대로, 별 것 없는 일상을 살아내게 만드는 힘이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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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맞는 지인들과 ‘합정동 공항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여행 갈 때만 가게 되는 공항에서의 설렘을 일상 속으로 끌고 들어오자는 취지. 동네의 작은 펍을 공항처럼 꾸며놓고, 하나의 여행지를 테마로 토크 콘서트도 하고 술과 음식도 즐겼다. 남미를 주제로 엠빠나다와 모히또를, 독일을 주제로 맥주파티를 여는 식이다. 입구에 체크인 카운터를 마련해 놓고, 항공권처럼 디자인한 입장 티켓에 출국 도장도 찍어주고. 그렇게 입장하면 조촐한 면세점과 공항 갤러리도 즐길 수 있다. 반은 장난 삼아 시작한 이야기로 파티를 기획하게 되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진짜 여행이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새삼 느꼈다. 공항을 일상 공간 속에 끌고 들어온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여행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공항에 갈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글, 사진 | 홍아미

여행 에세이스트. <지금, 우리, 남미> 저자. 20살 홀로 떠난 인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25개국 100여 개 도시를 누빈 중증의 여행중독자, 라고 하지만 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하는 30대 여자입니다. 거창한 세계일주도, 럭셔리 여행도 아닌, 그저 일상 속에 내가 원하는 여행을 녹이는 법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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