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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도 괜찮아

무지개가 있는 일상

by 홍아미



하와이는 ‘무지개 주’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만큼 무지개를 자주 만날 수 있다. 이 말은 곧 비가 잦다는 표현과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구름의 이동도 꽤 빠른 편이고 높은 산이 곳곳에 있어 고개를 지나기 전까지 퍼붓던 비도 고개를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춘다. 그러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무지개. 자동차 번호판, 도심을 가로지르는 버스는 물론 기념품 절반의 디자인에 무지개가 있을 만큼 ‘무지개’ 천국이라고 해도 과장됨이 없는 곳이다. 비 갠 후 따스한 햇볕과 함께 찾아오는 자연이 만든 마술, 일곱 빛깔 무지개는 기분 좋은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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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여행을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비가 내리면 성가신 것도 있고 마음과 달리 기분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비가 내려도 금방 그칠 것을 알기에 당황하지 않고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비 내린 후 무지개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여행객은 비가 내리면 여행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지인 중 한 사람은 여행지의 다양한 기상 정보를 종합하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비가 오지 않은 시기에만 여행을 떠날 정도다. 이처럼 어떤 여행자에게 비는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비는 공기 중 먼지나 유해 물질의 성분을 내포하고 있어 맞아서 좋을 게 없다고 우린 배운다. 특히, 봄 · 가을철 황사비는 내리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찝찝하다. 비 내린 후 풍경이 기분 좋은 건 아마 청명한 대기 때문 아닐까. 세상 어디든 ‘비 내린 후 맑음’은 고유 법칙이나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하와이는 날씨 여부와 상관없이 언제나 눈부시게 밝고 청명한 시야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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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낚시 중인 지인을 만나러 알라모아나 리저널 파크(Ala moana Regional park)에 갔다. 현지인들이 운동하거나 피크닉을 위해 많이 찾는 곳으로, 대규모 행사도 자주 열릴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한다. 공원과 인접해 있는 알아 와이 하버(Ala Wai Harbor)와 공원 가장자리에서 낚시를 할 수 있는데, 낚시를 좋아하는 지인 덕에 그날은 낚시로 공원을 즐겼다. 물론 낚싯대 던져놓고 수다 떨기 바빴지만 말이다. 부둣가에 앉아 하염없이 입질을 기다렸다. 물고기들이 잠잠해 자리에 앉아 허기짐을 달랬다. 라면을 끓여 밥을 말아 먹고, 준비해간 간식으로 심심함을 달래다 보니 갑자기 잿빛 기운이 공원에 드리우는 듯했다. 그러더니 ‘뚝’하고 떨어지는 빗방울.


지인이 하늘을 보더니 “비구름 잔뜩 몰려오겠구나”하고 태연한 듯 내뱉었다. 떨어지는 빗방울과 우릴 향해 다가오는 비구름을 확인한 후 자리에 펼친 음식을 주섬주섬 정리하기 시작했다. 던져놓은 낚싯대며 장비들을 추스르다 보니 빗방울은 더 굵어졌다. 그 순간에도 ‘괜찮다’ 하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때아닌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아닌가. 한 방울 뚝 하고 떨어지던 빗방울은 5분 채 지나지 않아 장대비로 변했다. 대충 챙긴 짐 꾸러미를 나눠 들고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는 더 거세졌지만, 그 와중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유유히 낚시를 즐기는 이들도 있긴 했다.

‘아~’ ‘어떡해?’ 하며 호들갑 거리며 뛰어나올 때는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겠다고 앞다투어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했다. 일부러 고인 물에 ‘풍덩’하고 발차기하지 않아도 떼는 걸음걸음마다 물웅덩이였다. 모두 말은 아꼈지만 아마 같은 심정이었을 테다. 하지만 멈출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빗줄기에 결국 마음을 비웠다. ‘에이, 비 좀 맞고 옷 좀 버리면 어때?’하고 체념하게 된 것. 비 맞은 생쥐처럼 속옷까지 흥건했지만 그런 서로의 모습을 보며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낄낄거리다 “언니 여기서 비 이렇게 맞은 적 있어?”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야~나도 일 년 넘게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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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까지 500m 정도 되는 길이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주차된 차에 돌아올 때까지 비는 계속 우릴 마중했다. 차에 있는 수건과 휴지로 대충 닦고 떠날 채비를 했다. ‘혹여나 비를 맞아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형부는 금세 차 안을 온기로 채웠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얼마나 열정적으로 뛰었는지 샌들 한쪽 버클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신발은 물을 함 움큼이나 머금은 듯 꽤 무거워져 있었다. 따뜻한 물로 씻어내고 나니 몸도 마음도 한층 가벼워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 단장 후 지인 부부와 함께 찾은 쌀국수집. 뜨끈한 육수 한 숟가락은 움츠렸던 우리 몸을 사르르 펴 주었다. 영화나 드라마 속 비 내리는 장면 같은 로맨틱함은 없었지만, 지인과 잊지 못할 추억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날 이후 비가 내리는 날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즐겨 듣는 플레이리스트가 존재하듯 여행도 마찬가지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보는 것도, 서점이나 도서관 구경에 나서보는 것도, 한가로이 카페에 앉아 비 오는 날의 운치를 느껴보는 것도.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그 걸음걸이에 내가 맞추면 되는 것뿐임을 말이다. 무지개 터널을 만끽할 수 있는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한 번의 무지개를 만나기 위해 꼭 한 번의 비를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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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들 버클이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비 맞으며 뛰던 그 날, 공원에서 처음 소개받은 부부가 있다. 마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겨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라는 말 대신 “며칠 전에 알라모아나에서 비 맞고 같이 뛰었던….”이라고 나도 모르게 인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 부부도 금방 기억해내며 배시시 웃음으로 반겼다. 알라모아나 파크에서 주룩주룩 내리던 비를 맞고 뛰던 추억은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한 장면임과 동시에 하와이언 가수 이즈라엘 카마카비보올레(Israel Kamakawiwo'ole)가 우쿠렐레를 연주하며 부르던 노래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를 흥얼거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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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혜

사보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꿈꾸지도 않았던 여행지, 하와이에서 사랑에 빠졌고 하와이 여행을 통해 여행하는 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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