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착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며, "네가 착하니까 좀 양보해", "배려해" 같은 말을 쉽게 던졌다. 어쩌면 이런 말들이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남보다 먼저 양보하고, 분위기를 흐리지 않으며, 어른들의 기대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특히 장애우인 동생이 있었던 나는 "누나니까"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부모님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언제부턴가 내 감정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살면 평화가 유지된다고 믿었지만, 정작 내 안에는 끊임없는 불안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감정을 억누르고,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정말 배려일까? 대학에 들어가서야 이 질문을 처음 던지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한 어느 모임에서 나는 늘 듣기만 하고 의견을 내지 않았다. "어차피 다들 원하는 게 있을 테니 나는 따라가면 되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넌 뭐가 좋아? 너도 네 의견 좀 내봐." 그런데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타인의 기분을 살피느라 정작 내 감정은 무시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삶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그 후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가고 싶은 여행지,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조차 흐릿했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착한 것이라고 배웠기에, 내 선택을 우선순위에 두는 법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더 이상 이런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스무 살 때 신랑을 만났다. 그는 나를 응원해주고,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줬다. 처음으로 내 선택을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의 지지 덕분에 나도 내 감정을 인정하고, 내 의견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식당에서 "아무거나 괜찮아" 대신,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주문했다. 친구들과 모임 장소를 정할 때도 의견을 내보았다. 처음엔 사소한 선택처럼 보였지만, 이 과정에서 조금씩 내 취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존중하는 법도 배워갔다.
그제야 깨달았다. 착하다는 것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은 좋지만, 내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대신, 나를 존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제는 "착한 사람"보다는 "솔직한 나"로 살기로 했다. 필요하면 "아니요"라고 말하고, 내 감정을 무시하지 않는 삶을 선택했다. 그러자 오히려 관계가 더 건강해졌다.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억지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나 자신도 그 배려의 대상에 포함하려 한다. 더 이상 타인의 기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내 안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착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로 한 순간, 내 삶은 한결 가벼워졌다. 마치 오랜 시간 조여왔던 굵은 매듭이 천천히 풀리는 것처럼. 그렇게 풀려난 마음은 가벼운 바람을 타고 어디든 자유롭게 흘러간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기쁨을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