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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는 바람도 쉬어갔다.

by 코난의 서재

요즘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가 엄청난 반응이라 하던데.. 그러다보니 제주도가

고향인 내가 가장 먼저 기억하는 장소는,

제주도 시골 마을, 돌담 안에 포근히 안긴 친할머니의 초가집이다.

억새를 새끼줄로 눌러놓은 낮은 지붕,

검은 현무암으로 쌓은 담장,

그리고 그 담을 넘기 직전에야 비로소 보이던 집의 전경.

그곳에 들어서면 언제나 느껴지던 냄새가 있었다.

마당 한켠에서 말라가는 고사리,

장독대 사이사이에서 피어나는 된장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 깊게 배어 있던, 며칠이고 끓여낸 꿩엿의 향.

할머니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가마솥에 불을 지피셨다.

꿩뼈를 오래 우려낸 국물에 엿기름을 넣고,

시간이 지나며 점점 색이 짙어지고, 향이 묵직해지는 그 과정.

그 곁에선 말이 필요 없었다.

한 번 뚜껑을 열어보시곤,

“호끔만 더 이시믄 되켜(제주도사투리)"라고 중얼거리듯 말씀하셨다.

나는 마루 끝자락에 쪼그리고 앉아

가마솥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 향기만으로 배가 부를 것 같았고,

그 온기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초가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그곳엔 ‘시간’이 있었고, ‘마음’이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사랑받았던 증거들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에서의 삶이 훨씬 더 길어졌고,

어린 시절은 점점 더 아득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어쩌다 어느 냄새를 맡으면,

그 초가집의 부엌과 마당, 그리고 할머니의 손길이 불쑥 떠오른다.

기억 속 첫 장소는 그렇게,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냄새와 함께 내 안에 남아 있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이다.

그 집에는,

내 마음보다 먼저 바람이 다녀가고,

나보다 먼저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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