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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숨기고 나를 찾던, 그 길 위에서

by 코난의 서재

제주가 고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종종 부러워한다. 바다와 바람, 푸른 하늘과 감귤밭. 관광지로서의 제주는 분명 아름답다. 하지만 내 마음속 제주는, 여행지보다 훨씬 조용하고 섬세한 감정들로 기억된다.

나는 지금, 나만의 감정지도를 펴고 있다. 제주라는 땅 위에, 내 마음의 기억들을 하나씩 놓아보려 한다.

먼저, 바닷가 옆 초등학교. 파도가 출석을 부르듯 창문을 두드리던 교실. 창밖을 멍하니 보던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잔잔한 위로였다. 칠판 앞에서는 늘 긴장했지만, 바다를 바라볼 땐 그저 숨을 쉬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내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던 날에도,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조용히 다가와 내 등을 토닥여주던 듯한 기억. 그래서 그곳엔 고요한 위로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조금 더 안쪽, 작은 동네슈퍼 골목엔 어린 시절의 씁쓸한 마음이 묻어 있다. 동생 손을 꼭 잡고 군것질 하나 사들고 가던 길. 누군가의 시선이 등을 꿰뚫던 그 순간들. “쟤는 왜 저런 애랑 다녀?”라는 말을 들었던 건, 어린 나에게 세상이 너무 차갑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그 골목엔 묵음의 상처라는 점을 찍는다.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슬픔, 꾹 눌러 담고 지나갔던 그 길.

그 골목을 돌아 올레길 끝자락에 있는 바위언덕에선, 혼자 자주 앉아있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면 조용히 그곳에 올라 바람을 맞았다. 아무도 몰랐지만, 그곳은 내 마음의 비밀방 같은 곳이었다. 울고 싶을 땐 거기서 울었고, 다짐하고 싶을 때도 거기서 했다. 내가 나로 돌아오는 길목, 그렇게 불러본다.

그리고 마지막, 할머니 댁의 마루. 바닥에 앉으면 나무 결 따라 햇살이 흘렀고, 그 위에 나는 발을 뻗고 누워 있곤 했다. 마루 끝자락에 놓인 감귤 상자, 느릿느릿 돌아가는 벽걸이 시계, 할머니가 물 끓이는 냄비 소리. 이곳은 나에게 시간의 속도를 늦춰주는 장소였다. 삶이 거칠게 느껴지던 순간에도, 그 마루에 앉으면 ‘괜찮아, 좀 쉬어도 돼’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여긴 단연 쉼의 좌표다.

사람은 자기가 걸었던 길만큼 성장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길 위의 감정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는지를 조용히 이끌어준다.

내 마음의 지도엔 제주가 있다. 그리고 그 제주엔, 조용한 위로와 상처, 회복과 사랑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래서 제주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조금 따뜻해진다. 그리움은 기억을 더 감싸 안고, 기억은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어쩌면 나는, 그 지도를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그리움이 선명한 날이면, 다시 꺼내 펼쳐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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