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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멈춰 세운 공간, 그리고 그 여운

by 코난의 서재

스무 살,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혼자 찾은 곳이 국립중앙박물관이었다.
학교 수업 과제 때문이었지만, 그날의 나는 이상하게도 박물관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전시실에 들어서자 묵직한 공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조명이 낮게 깔린 유리 진열장 속,
몇 백 년을 견디고 서 있는 불상의 미소가 어쩐지 나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 같았다.
“천천히 와도 괜찮아. 지금 네 속도 그대로.”

그때 나는 몰랐었다.
공부도, 인생도, 자꾸만 조급해하는 내 마음이
사실은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를 시간을 원하고 있었다는 걸.


하나하나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작은 유물 앞에서 길게 설명을 읽고,
조각난 항아리의 금이 어쩐지 사람의 상처를 닮았다고 느끼던 그 시간.
나는 처음으로 ‘배움’이란 게 꼭 머리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듣고, 때로는 그냥 조용히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도 배움이라는 걸.


박물관을 나서며 들이마신 저녁 공기 속에서
나는 조금은 덜 조급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공간이 내게 준 건 지식보다도
내 안의 불안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쉼의 감각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힘들 때면 종종 전시 공간을 찾는다.
미술관, 박물관, 공연장, 도서관.
그곳에선 내 속도가 가장 자연스럽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고,
나도 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문화 공간은 어쩌면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두고
나와 다시 마주 앉을 수 있게 해주는 자리.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나를 다독인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조금 더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 배움과 여운이, 오늘도 내 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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