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독자와의 약속, 플랫폼과의 협정, 그리고 미래의 나 자신과의 서약이 담긴 계약서 말이다.
첫 번째 조항은 '진정성'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을 마치 겪은 것처럼 쓰지 않겠다는 약속. 작년, 혼자 여행의 낭만에 대한 글을 쓰려다가 중단한 적이 있다. 정작 나는 혼자 여행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독자들은 거짓을 알아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해도 진짜와 가짜는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 조항은 '존중'이다. 몇 년 전 직장 상사와의 갈등을 소재로 글을 쓸 때였다. 처음 초안에서는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다시 읽어보니 그것은 글이 아니라 복수였다. 결국 상황보다는 내 감정과 깨달음에만 집중해서 다시 썼다. 내 이야기를 할 권리와 타인의 존엄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 그것이 창작자의 몫이다.
세 번째 조항은 '성장'이다. 초기 브런치 글들을 다시 보면 부끄럽다. 같은 주제를 반복하고, 뻔한 결론으로 끝나는 글들뿐이었다. 지금도 완벽하지 않지만 어제보다는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섬세하게 쓰려고 한다. 독자들이 내 글에서 무언가를 얻어가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이 계약서에는 명시되지 않은 조항들이 더 많다. 얼마 전 육아 스트레스에 대한 솔직한 글을 썼더니 전혀 다른 반응들이 쏟아졌다. 어떤 독자는 "나도 그랬다"며 위로를 건넸고, 다른 독자는 "아이에게 미안하지 않느냐"며 날을 세웠다. 내 개인적인 경험담이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맥락이 쉽게 사라진다. 내가 특정 상황에서 느낀 감정을 담은 글이 스크린샷으로 잘려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인용되기도 한다. SNS에서 내 글의 한 문장이 따옴표도 없이 떠도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 저작권이 단순한 법적 개념이 아니라 창작자의 의도와 맥락을 보호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와 결과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기로 했다. 선한 의도로 쓴 글도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고, 그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댓글로 상처받은 독자가 있으면 사과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으면 설명을 추가한다. 중요한 건 계속 성찰하고 배우려는 자세다.
브런치 글 하단에 자동으로 뜨는 저작권 표시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저작권은 내 글을 보호하는 방패만이 아니다. 독자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담보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내가 글에 서명할 때, 단순히 소유권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 글에 담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은 '용기'다. 불완전하더라도, 비판받을 수 있더라도,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라면 용기 있게 꺼내놓겠다는 약속. 어떤 글은 쓰기 전부터 논란이 될 걸 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이야기라면 그 부담을 감수한다. 신중하게, 책임감 있게 쓰되,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지는 않겠다고.
그것이 창작자가 세상과 맺는 가장 중요한 계약이라고 믿는다. 보이지 않지만 가장 무거운 계약서에 오늘도 나는 서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