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손이 크레파스를 쥐고 그린 그림 한 장이, 어떤 유명한 작품보다 오래 내 마음을 붙들었다.
아들의 다섯 살 생일 무렵이었다. 집 안 벽 한 켠에 덜렁 붙어 있던 그림. 해와 구름, 나무 한 그루, 그리고 사람 셋이 그려져 있었다. 삐뚤삐뚤하고 제멋대로였지만, 색은 진심이었다.
그날 오후, 아이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 혀끝을 살짝 내민 채 크레파스를 꼭 쥐고 있었다. “엄마 아빠 그려줄게!” 환한 목소리와 함께 건넨 그림을 받아든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종이 한가운데에는 웃고 있는 붉은 해가 있었고, 나뭇가지는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 셋 중 하나, 그러니까 ‘나’는 파란색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감 어디에도 없을 법한 색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그림은 그날의 내 기분을 꼭 닮아 있었다.
‘왜 얼굴이 파란색이지?’, ‘나무가 보라색일 리 없는데.’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곧 알게 됐다. 아이는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느끼는 대로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해가 행복해서 빨갛고, 나무가 신비로워서 보라색이며, 내가 조금 우울해서 파란색이 된 그림. 그것은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 정확한 감정의 기록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잘 그린’ 그림보다 ‘잘 느껴진’ 그림이 더 깊이 남는다는 것을. 아이의 손끝에서 태어난 삐뚤한 선들이 내게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진심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림은 냉장고 문에 붙여 두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실 때도, 저녁에 물을 마실 때도, 그 파란 얼굴의 내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 것 같았다. “오늘 네 마음은 무슨 색이야?”
그 그림을 본 이후, 나는 ‘표현’이라는 단어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예쁘게 포장한 말보다 서툴러도 진심이 묻어나는 말이 더 좋다는 걸. 회사에서 보고서를 쓸 때도,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도,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도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쓰는 이 말들이 진짜 내 마음 색깔과 닮았는지.”
아이는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그 그림은 서랍 깊숙이 고이 보관되어 있다. “그거 이제 좀 치워.” 아들은 부끄러워하지만, 나는 몰래 꺼내 그 선들을 바라보곤 한다. 그 그림은 여전히 내게 묻는다. 지금 너의 마음은 어떤 색이냐고.
요즘 말수가 줄어든 아들을 보며, 크레파스로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던 다섯 살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래서 가끔 나라도 색깔 펜으로 일기를 써본다. 별것 아닌 일상도 색으로 적으면 왠지 더 솔직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 그림은 지금도 나에게 창의의 언어로 말을 건넨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기교보다 마음이 먼저라고. 그래서 나는 요즘도 가끔 크레파스를 꺼내 아무거나 그려본다. 서툴러도 괜찮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다섯 살 화가처럼 자유로우니까.
진짜 예술은 박물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랍 깊숙이,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남아 빛이 바래지 않는 작품도 있다. 그리고 그 빛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 그 예술은 지금도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