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나에게 참 오래된, 그러면서도 늘 새로운 여행지다.
일본을 이십여년간 여행하고 일년에 10번이상 갔다왔다 할 정도이지만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지만 렌트카를 탈 때는 더더욱 길을 일부러 잃어보자는 생각을 한다.
오사카 in, 후쿠오카 out이어서....물른 신칸센도 좋지만 난 오래걸려도 천천히 운전해서가는 걸 택한다.
오사카에서 렌트카를 타고 규슈 북쪽을 거쳐 후쿠오카, 다시 무나카타라는 작은 도시로 향하던 어느 날이었다.
내비게이션은 목적지를 향해 빠른 길을 제시했지만, 나는 일부러 느린 길을 선택했고, 몇 번의 잘못된 좌회전 끝에 우리는 아주 오래된 골목에 도착했다.
길 위엔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었고, 낮은 지붕을 얹은 집들 사이로 빨랫줄이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장면은 내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낯설게, 그러나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게 다가왔다. 아무런 음악도 없었는데 마음속에서는 현악 4중주 같은 잔잔한 선율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다름'은 위협이 아니라, 내 안의 '이미 정해둔 풍경'을 흔드는 일이구나.
일본의 골목은 우리네 뒷골목과도 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의 존중 방식'은 사뭇 달랐다. 우리가 새것과 빠름을 사랑한다면, 그들은 오래된 것과 느림을 사랑한다. 그건 단순한 정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미학이었다.
그 경험은 내 글쓰기에 결정적인 전환을 만들어냈다.
나는 종종 짧은 글 속에서 빠른 감정의 결론을 내리곤 했지만, 일본에서의 경험은 ‘여백’을 배워가게 했다. 예를 들어, 후쿠오카의 작은 찻집에서 마신 말차 한 잔은 다 마시는 데 10분이 걸렸지만, 그 시간 동안 주인은 세 번 허리를 숙이고,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어는 없었지만, 그 무언의 정중함이 주는 서사는 내게 깊은 메시지를 남겼다. 말이 없어도 전해지는 것, 그 섬세한 감정의 결을 글에 담고 싶어졌다.
그 이후 나는 글을 쓸 때 한두 문장을 비워두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마침표 대신 쉼표로 끝내는 경우도 많아졌다. 서사 속 ‘마무리의 여백’이 독자의 감정으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한, 일본의 전통 축제에 초대받아 참여했던 사물놀이 공연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의 교차점을 안겨주었다. 현지인들은 우리의 북소리와 장단을 흥미롭게 바라봤고, 나는 그들의 ‘조용한 환대’에 깊이 감동받았다. 소리와 정적, 뜨거움과 차분함, 그 두 문화의 대비는 내가 글 안에서 감정의 강약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수업이기도 했다.
문화는 언어보다 먼저 마음을 건드리는 감각이다.
그것은 때로 향기이기도 하고, 골목의 빛깔이기도 하며, 낯선 이의 눈동자에 담긴 작은 예의일 수도 있다. 그런 순간을 여행을 통해 마주하고, 내 안의 굳어 있던 시선들이 서서히 풀리는 경험을 할 때, 나는 창작자가 아닌 배우는 사람으로서 더욱 겸손해진다.
문화의 다양성은 나에게 창작의 도구가 아니라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주는 거울이었다.
내가 믿고 익숙하게 여긴 방식들이 전부가 아님을, 그리고 낯선 길 끝에서 마주친 낯선 풍경이 내 안의 오래된 감정을 깨우고 새 언어를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에, 그 이후로 나는 가능한 한 자주 길을 잃어보려 한다.
그러니까, 창의성은 어쩌면 길을 잃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길을 잃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새로운 시선의 언어를 배우고, 그것이 나의 글에 여백과 결을 더해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도를 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