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걷는 중입니다

by 코난의 서재

그날은 여행 둘째 날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결국엔 별일이 되어버린 날.

"그래, 그냥 혼자 있어." 그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나는 숙소 문을 꽝 닫고 나왔다. 나도 참 유치했다. 여행 와서까지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그땐 그냥…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혹은 아무 말 없이 따라와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을지도.

낯선 동네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설레던 골목이 하루 만에 서운함의 배경이 되었다.

아무 방향 없이 걸었다. 걷는 동안 계속 그 말을 곱씹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왜 저 사람은 항상…' '아니, 나도 말이 좀 심했나…'

생각은 늘 그렇다. 처음엔 상대를 이기려고 시작하지만, 결국엔 돌아서 내 마음을 찌른다.

조금 걷다 보니, 작은 개천이 나왔다. 양옆으로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고, 개천 옆 좁은 길 위로 파스텔 톤 자전거 한 대가 조용히 지나갔다.

고요했고, 따뜻했다. 그 평화로움 앞에서 괜히 내가 더 작아졌다. 말없이 걸었던 나도, 말없이 남겨둔 그도. 조금 웃기고, 조금 미안했다.

나무 벤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앉지 않은, 페인트가 조금 벗겨진 오래된 벤치. 그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때 문득,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조금 전의 굳어진 얼굴 말고— 아침에 커피 타주던 얼굴, 지하철 놓쳤을 때 같이 뛰어주던 얼굴, 비 오는 날 내 우산 먼저 펼쳐주던 얼굴.

왜 사람은 화가 나면 좋았던 기억부터 지워버릴까. 왜 마음이 상하면 사랑받았던 순간들을 제일 먼저 외면하게 될까.

나는 그 벤치 위에서, 조금 울었다. 조금, 아주 조금.

걷는다는 건 참 묘하다. 몸이 움직일수록 마음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낯선 거리인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길처럼 내 안에 쌓였던 감정들이 조용히 풀려나갔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주변에 주황빛이 스며들었고, 내 마음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화가 났던 이유는 희미해졌고, 이제는 그저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 조금 망설였다. 아직 사과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먼저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숙소 문을 열었을 때, 그도 내 얼굴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나는 말했다. "나 바람 좀 쐬고 왔어. 벚꽃, 정말 예쁘더라."

그는 조용히, 내 손에 따뜻한 녹차 한 잔을 쥐어주었다.

그 길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였기 때문에 다시 함께할 수 있는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때로는 멀어져야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일본의 조용한 골목길이 내게 조용히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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