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피가 켠 신호등, 내가 누른 정지 버튼

by 코난의 서재

그날의 나는 참 잘했다

두피가 먼저 알렸다. 전날 밤, 베개에 머리를 대기도 어려울 만큼 뜨겁고 예민해진 신호. 예전 같으면 “조금만 더”를 외치며 하루를 밀어붙였겠지만, 그 아침엔 멈추기로 했다. 휴대폰 알림을 끄고, 해야 할 일 목록의 맨 위에 “쉬기”를 적었다. 별것 아닌 결심 같은데, 나에겐 가장 어렵던 선택이었다.


늦은 아침, 얼음을 가득 넣은 유리컵에 커피를 부었다. 부엌 창으로 노을 대신 오전의 빛이 길게 들어왔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마음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대충 입은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율동공원까지 천천히 걸었다. 호숫가 바람이 머리칼 사이를 지나갔다. 오리배가 물 위를 미끄러지고, 벤치엔 삶은 계란을 까먹는 어르신이 있었고, 멀찍이서 하모니카 소리가 들렸다. 평소엔 운동량을 채우려 서둘러 걷곤 했는데, 그날은 발이 가는 만큼만 걸었다. 내 마음이 따라갈 수 있는 속도로.


집에 돌아와 샤워를 길게 했다. 점심은 냉장고에 있던 애호박과 두부로 된장국을 끓이고, 달걀말이를 부쳤다. 나를 위해 차린 식탁에 혼자 앉아 천천히 씹었다. 그동안 배가 고픈 줄도 몰랐구나, 하고 조금 미안해졌다. 설거지는 바로 하지 않았다. 싱크대에 물만 받아두고 거실 바닥에 누워 숨부터 골랐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고 중얼거리며.


오후에는 일정 두 개를 미뤘다.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정중히 보내고, 그 미안함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미룬 시간으로, 그동안 계속 미뤄왔던 낮잠을 잤다. 스무 분쯤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두피의 뜨거움이 한 톤 가라앉아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다시 한 바퀴 걸었다. 오늘은 나를 다그치지 않는 하루로 마무리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밤에는 공책을 펼쳐 짧게 적었다.

— 오늘의 마음 날씨: 흐림 뒤 갬
— 잘한 일: 멈춘 일, 먹은 일, 걸은 일, 미룬 일
— 내일의 약속: 서두르지 않을 것

그리고 마지막 줄에 “그날의 나는 참 잘했다”라고 적었다. 무리하지 않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적어도 오늘만큼은 지켰으니까.


그날 이후로 달라진 게 있다. 첫째, 몸에서 오는 신호를 과장도 축소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적는다. 두피가 뜨거워지면 ‘정지’ 버튼을 누른다. 둘째, 하루에 한 번은 ‘마음 날씨’를 기록한다. 맑음이면 감사하고, 흐리면 우산을 챙기듯 대비한다. 셋째, 저녁 해가 지기 전 짧은 산책과 아이스 커피 한 잔을 작은 의식처럼 지킨다. 큰 결심 대신 작은 루틴으로 나를 돌보는 법을 배웠다.


돌아보면 그날의 자기돌봄은 특별한 기술이 아니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을, ‘나를 위해’ 했다는 사실이 다르다. 일정을 조정하는 용기, 식사를 챙기는 성의, 걸음을 늦추는 결심. 그 세 가지가 모여 나를 살렸다. 그날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멈춰도 무너지지 않아. 너는 돌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오늘을 잘 지나가면 내일을 버틸 힘이 생겨. 서두르지 말고, 네 속도를 믿어.”


혹시 “그런 날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 아마 너무 오래 견디느라 기록할 틈이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럴 땐 거창한 하루를 만들려 애쓰기보다,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돌봄 하나를 택해도 좋다. 물 한 컵을 천천히 마시고,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고, 해야 할 일 목록 위에 “쉬기”를 적는 것. 그 사소한 선택이 다음 장면을 바꾼다.


오늘의 나는 다시 공책을 연다.
— 내일의 다짐: 나를 서두르지 않게 할 것.
짧은 한 줄이지만, 그 한 줄이 내 삶을 지탱한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날의 내가 참 잘했기에, 지금의 내가 조금 덜 아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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