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알아준 순간

by 코난의 서재

며칠 전, 새벽에 집을 나서려다 창문 너머로 비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사람 목소리보다 먼저 나를 멈춰 세웠다.
물방울들이 난간을 두드리는 그 규칙적이지 않은 리듬이
“오늘은 조금만 느려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에 홀린 사람처럼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그날은 온종일 마음이 요란했던 날이었다.
해야 할 일은 밀려 있었고, 내 감정은 그 일들보다 더 먼저 나를 압도했다.
그럴 때면 사람의 말보다 자연의 무심함이 더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빗소리만은 유일하게 내 속도를 맞춰주는 존재 같았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다.
예전에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키우던 작은 토끼였다.
말도 안 통하는데, 내가 울컥한 날이면 꼭 내 발치로 와 앉았다.
내 기분을 정확히 알았다기보다,
그저 그 조용한 온기가 필요하다는 걸 눈치챘던 것 같다.
그때 느꼈던 묘한 위로—말 없는 존재가 주는 안정감—이
빗소리에 겹쳐서 다시 떠올랐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나는 여전히 매일 마음을 추스르며 살아가지만
이런 순간 하나가 하루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큰 사건도 아닌데, 삶이 아주 미세하게 방향을 바꾸는 느낌.
누군가에게는 보잘것없을 장면이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이런 조용한 교감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깨닫는다.
설명은 서툴러도, 마음은 통할 수 있다고.
말을 건네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고.

오늘도 그 존재 덕분에 세상이 조금 더 다정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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