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나는 '예스맨'이었다.
회식 가자고 하면 갔다. 피곤해도. 주말에 이사 도와달라고 하면 갔다. 내 일정이 있어도. 원하지 않는 부탁을 받으면 웃으면서 수락했다. 거절하면 미움받을 것 같아서. '싫어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왔다.
그 시절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근데 돌아보면, 착했던 게 아니라 겁이 많았던 거다.
삼십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 학교 엄마들 모임에서 행사 준비를 떠맡게 됐을 때도 '네'라고 했다. 이미 일이 밀려 있었는데. 친척이 연휴마다 우리 집에서 모이자고 할 때도 '네'라고 했다. 솔직히 쉬고 싶었는데.
남편이 한번 물었다. "왜 항상 니가 해? 다른 사람도 있잖아."
그때 내 대답이 기억난다.
"내가 안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잖아."
분위기. 나는 늘 분위기를 위해 살았다. 내 기분보다 전체 분위기가 더 중요했다. 그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믿었다.
변화는 마흔 중반쯤 시작됐다.
친한 선배가 갑자기 "이번 주말 같이 전시회 가자"고 했다. 평소 같으면 일단 '그래'라고 했을 거다. 근데 그 주말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몇 주째 바빠서 쉬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왔다.
"언니, 미안. 이번 주는 진짜 못 가겠어. 너무 지쳐서."
말하고 나서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 심장이 뛰었다. 선배가 기분 나빠하면 어쩌지. 서운해하면 어쩌지. 그런데 선배는 그냥 "그래, 푹 쉬어"라고 했다.
그게 끝이었다. 고작 그게 전부였다.
내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거절이, 그냥 그렇게 끝났다.
그 뒤로 조금씩 연습했다. "이번엔 어려울 것 같아." "미안한데 그건 못 할 것 같아."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처음엔 거절하고 나서 꼭 변명을 붙였다. 왜 안 되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상대방이 납득해야 할 것 같아서. 지금 생각하면 웃긴다. 거절에 납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니.
요즘은 그냥 말한다. "안 될 것 같아." 그게 다다.
이유를 물으면 대답하지만, 먼저 해명하진 않는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그걸 받아들이는 건 상대의 몫이다.
신기한 건, 거절을 시작했더니 오히려 관계가 편해졌다는 거다.
예전엔 억지로 약속에 나가서 웃음기 없이 앉아 있곤 했다. 속으로는 '왜 왔을까' 후회하면서. 그런 나를 상대방도 느꼈을 거다. 마지못해 온 사람 특유의 기운 같은 게 있으니까.
지금은 진짜 가고 싶은 자리에만 간다. 그러니까 가면 진심으로 즐겁다. 만나는 사람도 그걸 느낀다. '진짜 만나고 싶어서 왔구나' 하는 게 전달되는 것 같다.
결국 착한 척하면서 억지로 하는 것보다, 솔직하게 거절하는 게 서로에게 나았던 거다.
물론 여전히 거절이 쉽진 않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엄마가 뭔가 부탁하면 아직도 '아니'라는 말이 잘 안 나온다. 남편한테도 그렇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일수록 기대를 저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그래도 예전과 다른 건 있다.
'지금 거절하면 이 사람이 날 싫어하겠지'라는 생각이 줄었다. 한 번 거절했다고 관계가 끝나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진짜 나를 아끼는 사람은 내 '아니오'도 존중해준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 관계가 나한테 무슨 의미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거다.
50을 앞둔 지금, 나는 알게 됐다.
'네'라고 말할 때마다 내 시간이 빠져나간다는 걸. 원치 않는 일에 '네'라고 하면, 정작 하고 싶은 일에 쓸 에너지가 없어진다는 걸. 모든 부탁에 응하는 건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착한 척일 뿐, 결국 나를 소홀히 하는 거라는 걸.
거절은 이기적인 게 아니다.
내 한계를 아는 것이고, 내 시간을 지키는 것이고, 결국 나를 돌보는 것이다.
요즘 나는 '아니오'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졌다. 예전처럼 가슴이 쿵쾅거리거나 죄책감에 잠 못 이루지 않는다. 그냥 담담하게 말한다. 안 되면 안 되는 거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좋겠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변했다고 할 수도 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좀 달라졌네.
맞다. 달라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드디어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운 거다. 늦었지만.
NO라고 말하는 용기. 그건 상대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