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저 가벼운 일본 여행의 발걸음이었다.
낯선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간판의 글자들, 편의점 직원이 건네던 다정한 인사말.
그 소리들이 내 안에 들어와 자꾸만 말을 걸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하는 아주 사소한 호기심.
그 작은 불씨가 나를 TV 앞으로 이끌었고
어느새 나는 화면 속 애니메이션 대사 하나하나에 귀를 쫑긋 세우는 '진짜 덕후'가 되어 있었다.
코난이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며 외치던 그 팽팽한 긴장감 서린 말들이 자막 없이 내 귀에 박히기 시작했을 때,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아, 그냥 보고 즐기는 걸로는 부족해. 이 언어로 내 세계를 더 넓히고 싶어.'
그렇게 시작된 마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결국 내 책상 위에 JLPT N2라는 묵직한 도전장을 가져다 놓았다.
누가 보면 이 나이에 무슨 사서 고생이냐고, 고시라도 공부하냐고 묻겠지만 사실 나에겐 이게 가장 짜릿한 휴식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 집 안의 소음이 잦아들고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 허락되는 시간. 펜을 꽉 쥐면 중지 손가락 마디에 전해지는 묵직한 압박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갓 내린 커피의 쌉싸름한 향이 코끝을 스치고, 조용한 서재에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만 울려 퍼질 때—그때 내 몸의 모든 세포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쉰다. 하루 종일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빳빳하게 서 있던 신경들이 이 작은 몰입 속에서 느슨하게 풀리며 제자리를 찾는다.
단어 하나가 외워지지 않아 서너 번을 다시 쓰고, 멍하니 책장을 넘기며 헛웃음을 짓는 순간조차 나에겐 돌봄이다. 그건 바로 이게 '내가 선택한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등 떠밀어 하는 일에는 금방 진이 빠지지만, 내가 좋아서 뛰어든 이 수고로움은 오히려 나를 펄펄 살아나게 한다.
암기한 문장들을 입안에서 굴려보며, 나는 미래의 나를 상상한다. 언젠가 일본의 어느 정취 있는 골목에서 낯선 이와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내가 꿈꾸는 그 어떤 멋진 프로젝트를 일본에서 펼치고 있을 나의 모습. 그 상상은 지금의 지루한 암기를 가장 설레는 예행연습으로 바꿔놓는다. 나를 돌본다는 건 결국, 내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기꺼이 손잡고 같이 뛰어주는 일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 밤의 공부는 나에게 어떤 거창한 성공보다 단단한 신뢰를 준다. 세상이 정해준 속도가 아니라, 오로지 내 호흡대로 낯선 언어의 숲을 뚜벅뚜벅 걷고 있다는 사실. "너 아직 안 늙었어, 여전히 무언가를 향해 뜨겁게 설렐 줄 아는 사람이야"라고 속삭여주는 이 정성스러운 시간이 있기에 나는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도 나는 낯선 한자들 사이를 신나게 헤매며 나만의 작은 승리를 거두고 왔다. 이토록 다정한 불편함이
무너졌던 나를 다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