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언니가 있었다.
동네 엄마 모임에서 만났다. 아이들 나이가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카페에서 수다 떨고, 아이들 학원 정보 나누고, 가끔은 남편 뒷담도 했다.
편했다. 진짜 편했다.
근데 그 언니에게는 습관이 하나 있었다.
말끝마다 비교를 했다.
"너네 애는 수학 잘하지? 우리 애는 진짜 안 돼."
여기까지는 괜찮다. 위로해주면 되니까.
근데 다음 말이 문제였다.
"근데 너네 애는 체육은 좀 아닌 것 같더라?"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받아치기엔 애매하고, 넘기기엔 찝찝한 그 톤.
처음엔 그냥 웃었다. 두 번째도 웃었다. 세 번째부터는 웃는 게 힘들어졌다.
나는 그 언니를 바꾸려고 했다.
"언니, 그런 말 들으면 좀 그래."
한 번은 용기 내서 말했다. 돌아온 대답.
"어머, 내가 그랬어? 농담인데 너무 예민하다~"
내가 예민한 건가. 진짜 농담이었나.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그래, 내가 좀 예민했나 보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모임에서 내 옷을 보고 "너 요즘 살 쪘지? 옷이 좀..."
내가 새로 시작한 일을 듣고 "이 나이에 그걸 해? 대단하다 대단해~"
칭찬 같은데 칭찬이 아닌 말. 걱정 같은데 걱정이 아닌 말. 그 미묘한 톤에 매번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저 습관을 고칠 수 있을까.' '언니한테 솔직하게 말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두 번째 시도를 했다.
조심스럽게. 상처 안 주게. 말을 골라서.
"언니, 나 그런 말 들으면 좀 속상해."
언니 표정이 굳었다.
"내가 언제? 난 니 편이라서 하는 말인데. 진짜 친한 사이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하는 말 내가 얼굴 보고 해주는 거야."
그날 집에 와서 울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좋게 말한 건데 왜 이렇게 됐지. 우리 사이가 틀어지면 어쩌지.
삼십대의 나는 거기서 멈추지 못했다.
한 번 더, 한 번만 더 이야기하면. 내 진심이 통하면. 언니도 알아주겠지.
안 변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며칠은 조심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시 똑같았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근데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인정했다.
그 사람은 안 변한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울면서 말해도. 조심스럽게 말해도. 상대방이 바뀔 마음이 없으면 안 변한다.
이걸 받아들이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왜냐면 포기하는 것 같아서. 관계를 끊는 것 같아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근데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알게 됐다.
바꿀 수 없는 사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리를 조절하는 것뿐이라는 걸.
그 언니와 연락을 끊진 않았다.
다만 거리를 벌렸다.
단체 모임에서는 만난다. 근데 둘이서는 안 만난다.
카톡 오면 답은 한다. 근데 먼저 연락하진 않는다.
모임에서 그 말투가 시작되면 화장실을 간다. 핸드폰을 본다. 자연스럽게 빠진다.
처음엔 어색했다. "요즘 왜 이래?" 물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아무도 안 물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그 사실이 서운하면서도 편했다.
이게 비겁한 건가.
가끔 생각한다. 직접 말하지 않고 거리로 해결하는 게. 뒤로 슬쩍 빠지는 게.
예전 같으면 "비겁하다"고 느꼈을 거다. 근데 지금은 다르게 본다.
나를 지키는 거다.
모든 관계에서 솔직할 필요 없다. 모든 사람과 깊어질 필요 없다. 어떤 사람과는 적당한 거리가 최선이다.
그 언니만 그런 건 아니었다.
살다 보면 바꿀 수 없는 사람이 많다.
매번 약속 시간에 늦는 친구. 말했다. 안 변한다. 그래서 나도 그 친구와의 약속엔 여유를 둔다. 기다리는 시간에 책을 읽는다.
뒤에서 남 이야기하는 지인. 말했다. 안 변한다. 그래서 그 사람 앞에서는 내 이야기를 안 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 거리 조절이 나를 얼마나 편하게 했는지 모른다.
가족은 더 어렵다.
엄마한테도 바꾸고 싶은 게 있다. 남편한테도 있다. 딸한테도 있다.
근데 가족이니까 더 바꾸고 싶고, 가족이니까 더 안 변한다.
그래서 가족 사이의 거리 조절은 친구보다 열 배는 어렵다.
가깝다고 다 받아줄 필요 없다는 걸 아는 것과 실천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솔직히, 아직도 연습 중이다.
요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을 바꾸려고 쏟은 에너지는 대부분 허공에 뿌린 물 같았다.
그 시간에 나를 돌봤으면. 그 에너지로 내 마음을 챙겼으면.
근데 그때는 몰랐으니까. 그게 사랑인 줄 알았으니까.
상대를 바꾸는 게 관계를 지키는 거라고 믿었으니까.
이제는 안다.
안 변하는 사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
받아들이거나. 거리를 두거나.
그리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깨달았다. 바뀌어야 할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자리였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