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드 틀어놓고 귀 뚫기 100일

by 코난의 서재

처음에는 그냥 소음이었다.

화면 속 사람들이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나한테는 "샤샤샤샤샤" 하는 고주파 소음과 다를 게 없었다. 자막을 읽으면 내용은 알겠는데, 소리와 자막이 따로 놀았다. 입 모양과 소리가 따로 놀았다. 내 귀와 일본어 사이에는 두꺼운 유리벽이 하나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벽을 뚫어보겠다고 결심한 게 2023년 봄이었다.

계기는 단순했다. JLPT N3를 따고 나서 뿌듯해하던 어느 날, 다이아몬드 에이스 를 보는데 미유키 카즈야가 뭔가를 말했다. 포수답게 낮고 짧게, 딱 한 마디. 자막을 보니 "당연하잖아"였다. 근데 나는 자막 없이는 그게 "당연하잖아"인지 "다음에 보자"인지도 몰랐다. N3인데. 시험은 붙었는데. 미유키 말 한 마디를 못 알아들었다.

그게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일드를 '보는' 게 아니라 '듣는' 것으로 목표를 바꿨다. 하루 한 편, 100일. 처음 2주는 일본어 자막으로, 그다음 2주는 자막 없이, 그다음부터는 한 장면을 여러 번 돌려 들으며. 이른바 나만의 귀뚫기 100일 프로젝트.

보유 작품은 차고 넘쳤다.

겁쟁이 페달 은 오나다가 언덕을 오르면서 내뱉는 짧은 감탄사들이 많아서 귀 훈련용으로 제격이었다. "으아아아—!" 이건 자막이 필요 없다. 하지만 감독이 전술 지시를 내리는 장면은 달랐다. 야구 용어가 쏟아지는 다이아몬드 에이스 도 마찬가지였다. 미유키가 배터리 사인을 설명할 때, 그 속도로 튀어나오는 전문 용어들을 자막 없이 쫓아가려면 되감기를 네다섯 번은 기본이었다.

주술회전 은 난이도가 또 달랐다. 고죠 사토루는 말이 빠르다 못해 튕긴다. 특유의 가벼운 말투로 엄청난 정보를 총알처럼 쏘아대는데,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이 없었다. 그런데 같은 장면을 세 번 돌리고 나면 희한하게 윤곽이 잡혔다. '아, 이 부분에서 저런 말투를 쓰는구나.' 소리의 리듬이 먼저 들어오고, 그다음에 단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약사의 혼잣말 은 달랐다. 마오마오는 말이 적고 천천히 또렷하게 발음한다. 궁중 배경이라 경어 표현이 많아서 처음엔 낯설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점 때문에 귀에 잘 박혔다. 정중하고 또박또박한 일본어는 내 귀에 발판을 만들어줬다. '아, 저게 です구나. 저게 ございます구나.' 시험에서 읽던 활자들이 소리로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스파이 패밀리 는 중간 중간 숨통을 틔워줬다. 아냐의 대사는 짧고 직관적이고 표정이 소리를 설명해줬다. "응!" "먹고싶어!" 수준이지만 그게 웃겼고, 웃으면서 들으면 귀가 열리는 속도가 달랐다. 즐거운 감정이 언어 습득을 빠르게 한다는 걸, 나는 교육 컨설턴트 25년 경력이 아니라 아냐 덕분에 다시 배웠다.

행복한 결혼 은 시대극이라 언어 자체가 고풍스러웠다. 근데 미요의 말은 느리고 조용해서, 되려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미요가 키요카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을 열 번도 넘게 들었다. 내용이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자막 없이 대사를 전부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밤 열한 시, 식구들은 다 자고 있었다. 이어폰을 낀 채로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화면을 보던 나는, 미요의 대사가 끝나는 순간 이어폰을 빼고 가만히 있었다. 들렸다. 자막을 읽은 게 아니라, 귀로 들었다.

유리벽에 금이 간 기분이었다.

100일이 다 끝날 즈음, 나는 다이아몬드 에이스 한 장면을 다시 틀었다. 그 미유키 장면. "당연하잖아." 이번엔 자막을 껐다. 미유키가 말했다.

들렸다.

당연하잖아. 당연히 들려야지. 100일 동안 매일 밤 들었는데.

나는 혼자 웃었다. 너무 웃겨서, 그리고 너무 뿌듯해서. 마흔여섯 살에 귀가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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