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진짜 오래 몰랐다.
그 사람이 나한테 독이 된다는 걸.
아니, 정확히는 — 알면서도 몰랐다.
K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아이 학교 엄마 모임에서 처음 만났는데, 첫날부터 말이 잘 통했다. 취향도 비슷하고, 유머 코드도 맞고, 내가 힘들다고 하면 제일 먼저 "어디야, 나 갈게" 하는 사람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K를 만나고 집에 오면 꼭 한 시간은 누워 있어야 했다.
뭔가 싸운 것도 아니고. 기분 나쁜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그냥 몸이 무거웠다. 배터리가 바닥난 것처럼.
그때 내가 한 생각이 뭔지 알아?
내가 너무 예민한가 봐.
그랬다. 나는 오히려 나를 탓했다.
K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잘해주는데.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한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한 거 아닌가, 하고.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K는 만날 때마다 꼭 누군가 이야기를 했다. 대놓고 욕은 아니었다. "걔는 좀 그런 사람이야", "그 집은 원래 그래", 이런 식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꼭 이 말이 붙었다.
"나는 너한테만 하는 말이야."
나는 그게 우리 사이가 특별하다는 뜻인 줄 알았다.
근데 어느 날, 다른 친구한테서 우연히 들었다. 내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걸.
"나는 너한테만 하는 말"이 나한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었다는 걸.
그때 느낌이 뭔지 알아?
배신감보다 — 허탈함이었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냥 오래된 영수증 서랍을 열었더니 다 가짜 영수증이었던 그런 느낌. 뭐라고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냥 힘 빠지는 그 느낌.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이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이랑, 나한테 좋은 사람은 다른 거구나.
쉰을 바라보는 지금은 사람을 볼 때 딱 하나만 본다.
만나고 나서 내가 어떤가.
에너지가 채워지나, 빠져나가나. 가벼워지나, 무거워지나.
그게 전부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 솔직히 내가 어떻게 알아. 그 사람 사정이 있고, 그 사람 역사가 있고. 근데 만나고 나서 내가 어떤지는 내 몸이 안다.
몸은 거짓말을 안 한다.
K랑은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막 선언을 한 것도 아니고, 싸운 것도 아니었다. 연락이 뜸해지고, 약속이 한번 두번 흐지부지되고, 어느 순간부터 카톡이 짧아지고. 그렇게 됐다.
솔직히 아프긴 했다.
오래된 관계가 흐려지는 건, 이유를 알아도 아프더라.
근데 그 무렵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훨씬 편해졌다. 집에 오면 누워 있어야 했던 그 한 시간이 사라졌다.
그게 답이었던 거다.
혹시 주변에 그런 사람 있을까?
나쁜 사람은 아닌데, 만나고 나면 꼭 피곤한 사람.
그 사람이 왜 그런지 분석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그냥 조금 멀어지면 된다.
끊으라는 게 아니라. 조금 거리를 두는 거. 연락을 조금 늦게 하는 거. 약속을 조금 덜 잡는 거.
그게 나를 지키는 일이고, 사실은 그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쁜 사람이 아니어도 나한테 안 맞을 수 있다.
그걸 인정하는 데 40년이 걸렸다.
부끄럽지만 —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