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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ceptzine Oct 31. 2016

원서동 산책

conceptzine vol.34

창덕궁의 왼쪽 품을 껴안고 있는 동네.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면 돌담이 보이는 동네. 그러다 목을 빼고 서 있는 나무와 눈이 마주치는 동네. 볕 좋은 날 그런 동네를 두어 시간 돌다가 왔다. 글 & 사진 이혜인




13:30  /  북촌면옥


북촌면옥 앞을 지나가던 길, 유리창 너머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 요리를 먹고 있는 외국인을 보았다. 그 위로는 창경궁이 비쳤는데, 다중 노출 촬영한 필름 사진처럼 두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 보였다. 나는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별다른 고민 없이 가게에 들어갔다. 나 역시 창가 자리에 앉았다. 메뉴가 다양했는데 왠지 합이 좋을 것 같은 음식을 골라 시켰다. 가게는 한산했다. 식당 아주머니도 주문을 넣으시곤 마땅히 할 일이 없으셨는지 티브이 앞으로 가셨다. 손님이 몇 없었던지라 음식도 금방 나왔다. 



허연 김을 뽐내는 만둣국과 녹두빈대떡, 그리고 비빔냉면. 막장드라마를 오디오 삼으며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사실 유별나게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는데 궁을 바라보며 먹으니 어쩐지 풍요로운 기분이 들었다. 종종 생각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이야. 며칠 뒤 영업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가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아주머니는 조금 우물쭈물하시다가 오늘까지만 장사를 한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수많은 물음표가 생겼는데, 가장 궁금한 건 이거였다. 그날 계산을 하면서 내가 잘 먹었다는 인사를 했던가? 마땅히 그랬어야 하는데 말이다.




14:20  /  NOO


처음엔 색이 고운 자그마한 도자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초였다. 3~4년 전부터 향초가 유행하면서 여러 제품을 접하긴 했지만 이런 형태의 초는 처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한국적인 디자인을 초와 비누로 재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한국적인 디자인은 무엇일까? 한국에 살고 있지만 도리어 한국적인 것을 찾기가 어렵다. 사무실 아래엔 베트남 음식을 팔고, 길목을 따라 걸으면 유명한 일식집이 있다. 그녀는 어떤 은유를 버리고 아주 직접적인 방법으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한국의 도자기를 본떠 향초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한국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우리 일상의 물건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박물관에 있을 법한 도자기가 내 침대맡에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것도 은은하고 포근한 향이 난다면.


도자기 향초

상감기법을 응용한 ‘누’의 제품은 이름도 국보와 보물 그대로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모란넝쿨무늬항아리, 백자청화운룡문항아리 등 길고 어려운 이름이지만 발음하는 것만으로 청렴해진 기분이 든다. 밀랍과 소이왁스 등 천연재료를 주로 사용하고, 가격은 5만~15만 원대다.


영업시간 10:00~18:00 토·일 휴무 /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99 / 02-565-3328



14:40  /  목수책방


木水冊房. 좋아하는 단어가 모두 들어간 이름이다. 이곳은 서점이라기보다 출판 사무실과 가깝다. 평일엔 보통 10시부터 5시까지 문을 열지만 대표님의 스케줄에 따라 변동될 수 있어 정확하지 않다. 주말엔 문을 닫는다. 이렇다 할 명확한 정보가 없는 곳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목수책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싣는다. 목수책방은 자연, 생태, 환경 관련 책을 만들고 있다. 《지금 우리는 자연으로 간다》, 《식물 이야기 사전》, 《서울 사는 나무》, 《흙의 학교》 등이 있다. 


목수책방에 가려면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103-1 / 070-8152-3035




15:00  /  디자인잡화점 54


파란 슬레이트 지붕의 디자인잡화점 54. 브랜드 ‘웨일투웨일’이 운영하는 오프라인 숍이다. 언젠가 이곳에서 자그마한 나무 소품을 산 적이 있다. 단잠에 빠진 동물 모형이었는데 보고만 있어도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브랜드 이름 또한 낮잠. 낮잠의 디자이너는 이곳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레터프레스 카드가 보인다. 고래가 그려진 것도 있고 심플한 문장이 쓰인 것도 있다. 그 옆에는 고래 모형의 목걸이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데 자세히 볼수록 디자이너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그밖에 향초, 나무 도마, 진주 귀고리 등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보는 제품들이 모여있다. 그 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사용해도 질리지 않을 듯한 담백함이 돋보인다.



착한 선물

웨일투웨일은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에 귀를 기울인다. 고래 같은 멸종위기의 동물들을 위해 동물모형의 액세서리를 만들고 있다. 수익금의 일부를 환경보호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고 하니, 구매와 동시에 좋은 일에 참여할 수 있겠다. 


영업시간 11:00~19:00 일요일 휴무 /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54 / 010-6726-4544




15:30  /  고희동 가옥


우연히 고희동 가옥의 화실 사진을 보았다. 그때는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창 너머로 들어오는 빛이 무척 강했다. 그저 어느 화가의 고즈넉한 집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어느 화가가 무척 대단한 분이었다. 그는 한국의 첫 번째 서양화가라 했다. 일본 동경 미술학교에서 서양의 유화를 배웠고, 그 뒤로 한국에 돌아와 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다. 1918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미술단체인 ‘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새로운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미술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감상만은 명확했다. 색이 곱고 청아하며, 정교함보다는 세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주로 산, 바다, 꽃 같은 자연을 즐겨 그리는 듯했다. 서화실을 나와 반대쪽 복도를 향해 걸었다. 나무 의자와 이젤이 있는 전시실은 따뜻한 분위기였다. 그때와는 분명 다른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시 적삼을 입고 화필을 든 화가의 우직한 뒷모습을.



화가의 집 

전시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자료실을 비롯해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의 모습을 재현한 화실과 사랑방이 있어, 그의 업적뿐만 아니라 그 당시 예술가의 삶을 보다 세밀하게 엿볼 수 있다. 


개관시간 10:00~17:00 월·화 휴관일 /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16 / 02-2148-4165




16:00  /  카페9경


카페 9경은 고희동 가옥 바로 맞은편에 있다. 아담한 규모의 가게지만 두 면이 창으로 되어서인지 답답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장 구석에 있는 자리는 테이블이 창을 향해 있어, 가옥과 마주보고 앉아야 한다. 담 너머로 삐죽이 올라온 나무를 보고 있자니 원서동의 여러 계절을 상상하게 된다. 어느 날엔 이슬이, 어느 날엔 눈송이가 살포시 내려앉았다가 떠났을 것이다. 이럴 때면 티브이가 따로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카페 앞에서 멈추는 마을버스를 몇 대 보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별한 메뉴

이곳의 커피큐브밀크를 추천한다. 에스프레소를 아이스큐브로 만들어 우유와 시럽을 부어 먹는 메뉴. 라떼보다 진한 커피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영업시간 10:00~19:00 화요일 휴무 /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75 / 010-4464-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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