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내린 길은 어지러운 발자국이 가득하다. 눈으로 덮이지 않은 거리에선 만날 수 없었던 수많은 발자국. 문득 삶의 길에도 내 앞에 무수히 많은 걸음들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단지 흰 눈으로 덮이지 않아 그 발자국들을 직관적으로 보지 못할 뿐. 그럼에도 나는 혹은 우리는 내 앞에 걸었던 발자국들을 따라 걷고 있음을. 갑자기 함박눈에게 감사를 ^^
내딛는 발걸음마다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평소 걸음과 다를 바가 없는 밤 산책이지만 불투명한 미래는 내 마음을 짓누른다.
물질이 의식에 대해 일차적이지만, 의식은 물질을 지배하던가...?
뭐 맞던지 아니던지^^.
열 달가량 '지지고 볶던 프로젝트'가 끝이 났다.
'지지고 볶고'는 '갑'이던 H사 담당자 K의 표현이다. 그 분야에서 오래도록 일해온 그는 이 프로젝트의 방향을 제시할 'K'라 불리는 핵심 인물이었다. 그가 이 열 달간의 일정에서 얻을 목표를 제시해 주면 그것을 구체화하고 구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하지만 여기서 다 서술할 수 없는 'K 그만의 사정' 그리고 'K와 S의 견제' 또 그리고 'K와 S와 우리와의 관계' 등, 여러 사정과 관계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몇 년 뒤면 정년을 맞이할 K는 노련했다. '적당히' 목표를 던져 줬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 맞지 않으면 또 '적당히' 수정된 목표를 던져 주기를 반복했다. 프로젝트 초기에 '정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진행을 해도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정확한'이 아닌 '적당한' 목표가 수시로 변경되지만 납기일에는 변경이 없는 소프트웨어(시스템)는 애초에 '실패'가 불을 보듯 명확했다. 건축으로 치자면 '이 건물은 거의 99% 무너지게 되어 있는 그런 것'이었다. 다만 건축물은 명확하게 무너지지만, 소프트웨어 시스템은 '명확하게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무너진 거나 다를 바 없는 것을 또 어찌어찌 손을 대면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있는 것이 건축물과 소프트웨어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 시간과 돈을 들인다는 전제하에.
무너지지 않으나 무너진 거나 다를 바 없는 상태. 처음부터 불을 보듯 뻔한 실패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열 달을 달려왔다. 갑의 서로 다른 조직에 속한 K와 S 두 군데에서 압박을 받아온 H사 계열사 소속 PM(프로젝트 매니저)은 종료 수십일 전부터 날짜를 세었다.
'아~! 오늘은 드디어 30일 남았네요'
'우와...! 드디어 10일 전입니다. 이 날이 오네요!'
건축물로 치자면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에 대해 누구라도 경고음을 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건축물이건 소프트웨어건 '경고음'은 거의 최종 말단에서 표현되지만, 그것이 뚫고 올라가는 윗선은 그리 높지 않았다. 기껏해야 바로 위 PM과 '갑'의 실무 담당자 P의 소주잔 사이에서,
'아... 이것 참 큰일이에요.'
'이러다가 프로젝트가 완료될지 모르겠어요'
하며 한탄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P가 S에게 정확한 현실 보고를 해야 하지 않나... 싶지만 그것이 꼭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확한 현실'이라는 것이 또 이 소프트웨어 세계에서는 눈에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S가 P의 생사여탈권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한 액수의 성과급(웬만한 승용차 한 대 값이라고 한다^^)을 결정할 수 있는 관계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소위 미치지 않고서는 함부로 상사의 생각에 반하는 부정적 의견을 표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노련한 K는 본인에게 책임소재가 떠넘겨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목표를 제시하고 있었고, 주관부서 책임자인 S는 K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누적되고 있는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개발팀에 대한 압박의 수위만 높여갔고, S 휘하의 책임자 P는 S에게 문제를 직언할 엄두를 못 내고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물론 P가 S에게 직언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서로 '적당히' 혹은 본인에게 '책임소재'가 떠 넘겨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최우선인 상황에서 '전지적 권한'을 가진 누군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하지 않는 한 해법은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파트에서 7년을 일해왔던 PM의 노련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종료일에 실제로 종료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외관이 멀쩡한 시스템이라고 해도 각 담당 개발자들이 알고 있는 오류가 여기저기 있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이 프로젝트의 외관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터져 나왔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찌 수습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한두 달 연장이라도 해서 정상화시키지 않고서는. 하지만 '한두 달 연장' 같은 방법은 그 누구도 먼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해법이었다. '적당히' 목표를 제시했던 K도, 정확한 상황 파악을 못하고 납기 단축시켜 윗선에 폼나게 보고하려 했던 S도, S의 온갖 구박을 받으며 견뎌온 P도. 그리고 개발팀의 우리 PM도 개발팀원인 '나'와 개발자들도. 당연히 거기에는 '돈'이 걸려있고, 원인에 대한 책임소재가 걸려있기에...
건물이 무너지건 말건 최종 마지막 종료일은 다가왔다.
노련한 PM의 작전(?)에 의해 이 시스템이 비록 내일 폭삭 내려앉을지라도 오늘은 종료가 되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우린 노트북 로우레벨 포맷(Low Level Format)을 하고, 마음속 찜찜함도 일말의 책임감도 함께 포맷을 하였다. 그리고는 몇 년간 일해왔던 H사를 빠져나왔다. 내일이면 한 시간 넘게 걸리던 통근버스의 고단함이 그리워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지난여름만 하더라도 개발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개발자를 구하지 못해 PM만 선정해놓고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었다. 미국의 자이언트 스텝이 어떻고 빅스텝이 어떻고 나와 상관없어 보이던 금리 인상과 코로나 이후 금리 인상에 따른 전반적 경기 침체 분위기가 순식간에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의 일자리를 삼켜버렸다.
'어느 프로젝트에서 호출이 오겠지...'
하는 근거 없는 희망은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점점 암울해져 갔다.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보냈고 어느 프로젝트에 지원해 보겠다는 연락받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아예 연락이 없거나, 기다려 보거나 하는 통화 혹은 문자가 오고 갔다. 어느 프로젝트에 지원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희'가 되었다가 채택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비'로 바뀌면서 소위 '희비'가 교차해 가기를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그리고 보름이 지났다.
'아... 씨X. ㅈ됐다. 장기전이네.. ㅠ'
이젠 오히려 마음이 살짝 편해졌다.
보름만 쉬고 해 넘겨 바로 프로젝트 투입을 원했는데 일단 물 건너가버렸다.
이젠 한 달을 쉴지 두 달을 쉴지 알 수가 없다.
'일단 적금을 하나 깨야 하고...'
'그 다음엔 나스닥 ETF를 깨야 하고... 아... 나스닥 개박살 났는데... ㅠ'
어느 것을 먼저 깰지 갈등을 하기 시작했다. 명절에는 늘 일을 하면서 맞았는데 이번에는 틀렸구나 싶기도 했다.
010-XXXX-0000
전화벨이 울렸다. 여기저기 보내놓은 이력서 보고 전화가 오곤 했기에 재빨리 받았다.
'경향신문. O부장입니다. 선생님 정권이 바뀌고 조중동이 날뛰면서 저희가 무척 어렵습니다. 이번에 주간경향 한번 구독 후원해 주시면...'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일을 쉬고 있어서요. ㅠ'
몇 년 전 한번 구독했던 적이 있는 경향신문에서 온 전화였다. 끊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평소 우리가 원하는 기사가 경향이나 한겨레 등에 실리면 얼마나 반갑고 했던가... 하지만 그들에게 우린 관심을 보내주고 있는가 싶기도 하고... 민중의 소리나 뉴스큐 응원하기도 바쁜 판에 싶기도 하고... 내 코가 석자인데 싶기도 하다.
해가 바뀌었다.
12월 30일의 태양과 12월 31일의 태양 차이만큼 에 불과한... 12월 31일의 태양과 1월 1일의 태양이지만, 인간이 정해놓은 기준에 의해 하루 만에 태양은 1년 차이를 내며 바뀌어 버렸다.
평소 어두운 밤 산책길 내 블루투스 헤드폰에서는 바흐 첼로 모음곡 킴 카쉬카시안의 비올라 연주가 흐르곤 했다. 하지만 지난 보름간의 산책길에서는 여유롭게 바흐를 들을 수 없었다. 메탈리카의 'For Whom The BellTolls'나 메탈밴드 크래쉬의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메탈 버전 같은, 고막을 찢어대는 곡을 들으며 불안한 감정을 숨기려 애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