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살며 마주하는 극한의 비극 가운데 하나는 바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틀이다. 이 단순한 구분은 때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가리고, 깊은 이해를 방해한다. 수 클리볼드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인 에릭 해리스의 어머니로서, 비극적인 사건 이후 자신과 가족이 겪은 고통, 그리고 그에 따르는 사회적 낙인과 싸워야 했다. 이 책은 단순히 범죄자의 가족으로서의 회한을 담은 자서전이 아니라, ‘죄책감’과 ‘인간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사건이 세상을 뒤흔들고, 수많은 이들의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그 순간 이후에도, 그녀는 어머니로서 자신의 아들을 잊을 수 없었다. 에릭 해리스는 그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지만, 그도 한 인간이었다. 책 속에서 수 클리볼드는 아들의 어린 시절부터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며, 그가 왜 그 길을 걷게 되었는지 이해하려 애쓴다. 이는 단순한 변명이 아니다. 오히려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났는가’를 묻고, 사회와 인간의 복잡한 구조를 돌아보는 용기 있는 시도다.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겁고도 섬세하다. 독자는 수 클리볼드가 느낀 끝없는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사회적 배제 속에서 ‘용서’와 ‘이해’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를 실감한다. 그녀는 가해자의 엄마로서, 자신도 피해자의 가족처럼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는 그녀에게, 그리고 그녀의 가족에게 극심한 적대감을 보내며 ‘악의 편’으로 규정한다. 이중의 고통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도덕적 책임을 성찰하게 만든다.
이 책은 우리 사회가 가해자와 그 가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그 시선이 얼마나 인간적인 연대와 회복을 방해하는지 묻는다. 또한, 죄책감에 짓눌리면서도 인간적인 사랑과 연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머니의 고백은,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공감’과 ‘복잡한 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용서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이해가 가능하려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성찰이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그것은 답이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그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누구든, 심지어 가해자의 가족일지라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존중의 토대 위에서만 진정한 회복과 공존이 가능함을 깨닫게 해 준다.
글을 마친 뒤, 오랫동안 망설였다. 마지막 두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과연 그 문장들을 피해자 측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도 아니고, 고통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도 아니다. 그런 내가 “존중”이나 “회복” 같은 단어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워야 마땅하다. 과연 이런 식의 갈무리가 가능하기는 한 걸까? 내 말이 너무 관념적인 건 아닌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국 나는 나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나를, 스스로 설득해 달라.”
다음 글은 그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마지막 두 문장을 다시 들여다보자.
“우리는 누구든, 심지어 가해자의 가족일지라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존중의 토대 위에서만 진정한 회복과 공존이 가능함을 깨닫게 해 준다.”
이 문장은 ‘가해자를 용서하자’거나 ‘이해하자’고 말하는 문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가족 또한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식이며, 고통 속에 있는 또 다른 인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조심스러운 호소에 가깝다. 이 책이 말하는 ‘가해자의 엄마’는 죄를 지은 당사자가 아니라, 그 죄의 결과로 인해 삶 전체가 무너진, 이중의 고통을 감당하고 있는 또 하나의 상처 입은 존재다.
그러나 이 문장이 피해자에게 곧바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어떤 이에게는 이 말이 너무 이르거나,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회복과 공존이라는 말은 오직 피해자의 고통이 먼저 충분히 존중되고, 그 상처가 사회적으로 온전히 수용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 글이 관념적인가에 대한 물음에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네 말은 다소 관념적으로 들릴 수는 있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것은 ‘누가 더 아픈가’를 가르려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어디서 멈춰야 하고, 어디서 다시 나아갈 수 있을지를 함께 성찰해 보자는 조심스러운 초대에 가깝다.
네가 쓴 문장은 피해자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모두가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말이 당장 피해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느냐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려는 너의 태도다. 그 조심스러운 시작이야말로 서로를 이해하고 회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