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맹목이 들끓는 『눈먼 자들의 도시』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유 없이 ‘눈먼 자’가 되어간다. 이 충격적이고 초현실적인 사건은 단순한 재난 소설의 틀을 뛰어넘는다. 사라마구는 ‘눈먼다’는 행위를 신체적 장애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현대 문명사회가 마주한 ‘무지’와 ‘외면’의 은유로 삼는다. 눈먼 자들은 단순히 시력을 잃은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자신에 대한 깊은 불신과 단절을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소설에서 ‘눈멀음’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문명 전체를 뒤흔드는 집단적 위기로 나타난다. 우리는 진실 앞에서 머뭇거리고, 불편한 현실은 애써 외면한 채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스스로 ‘눈먼 자’가 되어간다. 사라마구는 이 집단적 맹목을 통해 문명이 얼마나 쉽게 균열에 이르는지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애써 보지 않으려는 태도, 외면과 방관의 일상이 어떻게 공동체를 조금씩 붕괴시키는지를 섬뜩하도록 생생하게 묘사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폭력과 무정부 상태가 난무하지만, 그 와중에도 연대와 희망의 씨앗이 움튼다. 사라마구는 이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조차 인간의 존엄성과 상호 책임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탐색한다. 그는 진정한 ‘눈멀음’이 단순한 시각의 상실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타자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정보 과잉과 감각의 마비’라는 시대적 현실과 깊이 맞닿아 있다.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정작 본질을 놓치고,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점점 ‘눈먼 자’가 되어가고 있다. 사회적 연대는 흔들리고 인간관계는 희미해지는 오늘, 사라마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뜬 눈’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단순한 소설을 넘어, 인간 존재와 문명의 근본적인 문제를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눈먼 무지와 맹목 속에서도 인간성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다시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이 책은 우리가 외면해 온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만들고, 진정한 ‘보기’와 ‘이해’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결국 보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함께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우리 모두의 과제임을 깊이 일깨운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문명이 무너지고 시야를 잃은 인간들이 겪는 절망과 혼돈을 그리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사라마구는 물리적인 시력을 잃은 인간들이 오히려 내면의 눈, 즉 양심과 공감, 연대의 감각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맹목과 무지를 극복하는 길을 은유적으로 제시한다.
그 길은 거창하거나 영웅적인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함께 무너진 질서 속에서도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바로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정보를 안다고, 많이 본다고, 말한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넘어 사람을 보고, 사실 너머의 진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맹목에서 벗어나는 길은 ‘본다는 것’의 윤리적 의미를 회복하는 데 있다. 단순한 시각의 기능이 아닌, 세계와 타인을 책임 있게 응시하는 능력. 그리고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 성찰과 타자에 대한 이해의 확장, 즉 앎을 향한 열린 태도에 있다.
사라마구가 말하려 했던 진짜 시력은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자신과 세계를 둘 다 진실하게 마주할 수 있는 마음의 시선이다. 우리는 각자의 눈을 뜨는 동시에, 함께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무너진 문명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