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망가의 말년, 자의식과 욕망의 균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신화처럼 공고히 쌓아온 위상을 말년에 이르러 스스로 허물어뜨린다. 오랜 세월 쌓은 신뢰와 존경이 이름 앞에 머물러 있건만, 생의 끝자락에서 그들은 종종 극적인 추락의 서사를 남긴 채 무대 아래로 퇴장한다. 그것은 단발적인 실수가 아니다. 반복되고, 해명되며, 때로는 스스로 정당화된다. 그래서 더 씁쓸하고 아프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자문하게 된다.
“왜 그는, 인생의 말미에 이르러, 그토록 공들여 쌓아 온 명성을 스스로 갉아먹는가?”
침묵하지 못하는 자들
명망가의 말년은 흔히 ‘말’로 가득 채워진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말한다. 해석하고 진단하며 훈계한다. 과거의 찬란한 업적과 수사학적 재능은 여전히 그들의 곁에 머물러 있지만,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의 언어는 더 이상 시대의 감수성과 교감하지 못한다. 한때 어떤 세대에겐 훈장처럼 보였던 말이, 또 다른 세대에겐 권위로 들렸던 말이, 이제는 피로와 거부감을 불러오는 언어로 변해버렸다.
말년의 지식인이나 정치인은 종종 ‘침묵하는 법’을 모른다. 아니, 모르는 척한다. 말이 곧 존재의 증명이었던 생애를 살아온 이들에게 침묵은 곧 퇴장을 의미하고, 퇴장은 다시 잊힘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바로 그 집착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부식된 위상을 드러낸다. 그들이 던지는 언어는 이제 진단이 아니라 집착으로, 해석이 아니라 억지로 읽힌다. 한때 시대를 이끌던 말은 더 이상 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외딴섬으로 밀어내는 밧줄이 된다.
위선이 벗겨졌는가, 본색이 드러난 것인가
유시민이라는 이름이 그 대표적 사례로 언급된다. 그는 오랜 시간 진보 진영의 전략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이성적 언변과 분석적 사고를 무기로 삼아왔다. 그러나 최근의 행보는, 그가 과거에 보여주었던 ‘합리적 태도’가 정치적 목적에 따른 역할 수행이었는지, 혹은 실제로 그렇게 믿었던 신념이 변형된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어느 쪽이든, 대중은 혼란을 느낀다.
그의 최근 설화는 단순 실언으로 보기 어렵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자기 확신의 결정체이자, ‘내가 옳다’는 내면의 확성기에 가깝다. 예전에는 그 확신이 시대와 어울렸을지 몰라도, 지금은 어긋난다. ‘위선의 탈락’이자 ‘자아의 낙진’이라는 비판이 이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과거의 태도가 가면이었고, 지금의 모습이 본질인가? 아니면, 지금이야말로 감추고 억눌러왔던 진짜 자기 욕망과 분노가 드러나는 순간인가? 어느 쪽이든, 말년의 그들은 더 이상 스스로를 꾸미지 않는다. 다만, 그 알몸의 자의식이 과연 설득력을 가지는가의 문제만 남는다.
말년의 붕괴: 위상은 어떻게 무너지며, 그들은 왜 침묵하지 못하는가
-명망가의 말년, 자의식과 욕망의 균열에 대하여
왜 그들은 스스로를 망가뜨리는가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욕망을 거두지 못한다.
명망가에게 명성은 단지 사회적 자산이 아니다. 그것은 곧 존재의 근거이며, 자아의 중심축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한다. “지금도 나는 통찰할 수 있다”, “내가 입을 열면 여전히 세상이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변한다. 권위는 희미해지고, 플랫폼은 다변화되며, 감수성은 더욱 섬세해진다. 과거에는 빛났던 언어가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독백으로 들린다.
문제는 그 변화 앞에서 이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더 정확히 말해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자신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일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부정당하는 듯한 아픔을 동반한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더 확신에 차서, 더 거칠게, 더 자주 말한다. 그것은 명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가속 장치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자신을 갉아먹는다.
구조적 패턴: 자의식의 노화
말년의 붕괴는 단지 한 개인의 타락이나 일탈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조적 현상이다. 대중은 이들을 오랜 세월 ‘말하는 존재’로 기억해 왔다. 말이 곧 존재였고, 언어는 권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기억은 역할로 굳어지고, 역할은 점차 구속이 된다. 그들은 침묵을 곧 망각과 사라짐의 전조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하고, 결국엔 자신의 언어로 자기 자신을 소비한다.
바로 여기에 노년기의 자의식이 취약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정신의 노화가 아니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정체성의 노화다. 삶 전체를 통해 구축해 온 자아의 서사가 더 이상 현재의 맥락에서 유효하지 않을 때, 그 불일치는 뿌리 깊은 불안을 불러온다. 그 불안을 이기지 못한 자는 결국 존재의 과거형으로 전락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드는 한 문장이 있다.
“당신은 한때 위대했지만, 지금은 불편하다.”
그들의 마지막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모든 추락이 반드시 완전한 부정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말년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복합적 인물’로서의 깊이와 복원이 가능해진다. 침묵을 택한 이, 진심으로 성찰한 이, 자신의 오류를 솔직히 인정한 이는 비록 불완전했을지언정, 인간적 존엄과 존경을 회복할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침묵 대신 고집을, 반성 대신 공격을, 오류의 인정 대신 타인에 대한 비난을 택한 자는 결국 자기 자신에 의해 스스로 패배한 인물로 남게 된다. 누군가의 평가가 아니라, 그의 태도와 선택이 그 인생의 최종 문장을 쓴다. 말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결론이며, 그 결론은 때로 전 생애를 재해석하게 만드는 서사의 마지막 열쇠가 된다.
에필로그: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누구에게도 완전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 인간이 자신의 말년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그 생애 전체의 윤곽을 결정짓는 마지막 붓질이 된다. 그것은 단지 언행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성찰의 깊이,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어떤 방식으로 이별하는가의 문제다.
진정으로 위대한 말년은 어쩌면, 더 이상 말하지 않음으로써 완성되는지도 모른다.
혹은, 오래도록 붙잡아온 명성을 기꺼이 내려놓는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이 글은 특정 인물을 단죄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인물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적 징후와 인간 존재의 복잡다단성을 직시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