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루팡’이라는 구조적 자화상

우리는 왜 일하는 척하게 되었나

by 콩코드


《가짜 노동》으로 본 한국 사회 일터의 진실


“오늘도 아침에 나와 자리에 앉았다. 오전 회의 두 번, 간단한 이메일 응대, 보고서 서식 정리. 그렇게 하루가 끝났다. 무언가를 하긴 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서울 마포구의 한 공기업에서 6년 차로 일하고 있는 김 모 씨는 매일 ‘의미 없는 반복’ 속에서 일상을 보낸다. 그는 이를 ‘업무라 쓰고 연기라 읽는다’고 표현했다.


한국 사회에서 ‘월급 루팡’은 이제 놀림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구조가 허용한 ‘생존 전략’이 되었고, 집단적 무기력에 저항하지 못한 결과물이 되었다. 누군가는 웃으며 “저도 루팡입니다”라고 말하지만, 그 속에는 조직의 피로와 개인의 좌절이 뼈처럼 박혀 있다.


덴마크의 철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아네르스 포스 옌센은 저서 《가짜 노동》에서 이 문제를 통렬히 짚어낸다.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의미 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한국 사회에서 더욱 날카롭게 체감된다. 우리는 진짜 일보다 일처럼 보이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으며, 조직은 그런 사람을 더 ‘성실한 직원’으로 인정한다. 가짜 노동이 능력으로 착각되는 세계. 그 속에서 ‘월급 루팡’은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 성공한 사람들’


‘월급 루팡’이라는 말은 직장에서 하는 일은 없지만 급여는 꼬박꼬박 받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많은 직장인들은 퇴근 후 자조 섞인 말로 이렇게 묻는다.

“나는 오늘 진짜로 무언가를 해낸 것일까?”


실제로 OECD 기준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장시간 노동 국가다. 그러나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평균 이하다. 다시 말해, 오래 일하지만 효율은 낮다. 이 간극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정답은 조직 곳곳에 숨어 있다.


예컨대, 보고서를 쓰기 위한 보고서, 내부 회의에서 논의할 사안을 정하기 위한 사전 회의, 중간 관리자에게만 의미 있는 형식 수정 요청 등은 매일같이 반복된다.

공공기관과 대기업에서는 보고서의 ‘결과’보다도 ‘포맷’이 더 중요한 평가 요소다. 수치보다 색상 배열, 인사이트보다 슬라이드 폰트에 더 많은 수정 요청이 들어온다. 내용은 그대로인데 표지만 다섯 번 바뀐다.


《가짜 노동》은 이러한 행위를 가리켜 "진짜 일의 흉내만 내는 일"이라 부른다. 책에 따르면, 이러한 활동은 바쁘게 보이게는 만들지만 실제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조직은 ‘보이는 일’을 칭찬하기 때문이다. 이메일 응답이 빠르고, 회의에서 발언을 자주 하고, 늘 자리에 붙어 있는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조용히 일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조직 안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으로 오해받는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 그 침묵의 장치들


이 구조는 누군가의 악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조직은 효율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그 안의 문화는 여전히 ‘성실한 태도’를 중시한다.


가장 뚜렷한 예가 ‘야근 문화’다.

많은 회사에서 직원들은 6시 정시에 퇴근하면 “일이 없는가?”, “성의가 부족한 것 아닌가?”라는 시선을 받는다.

한 중견기업의 대리 직급 B씨는 이렇게 말했다.

“상사는 말하죠. ‘자율적으로 정리해’. 그런데 6시에 가면 ‘벌써 가?’라고 해요. 그러니까 저는 메일을 7시 30분에 예약 발송해요. 안 보이게 늦게까지 있는 척하는 거죠.”


이러한 문화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조직 스스로가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장시간 근무가 미덕이 되고,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능력처럼 간주되는 순간, 사람들은 진짜 일보다는 ‘자리를 지키는 일’에 익숙해진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연극의 배우처럼 행동한다. 무대에서 ‘일하는 직장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실제로는 아무런 생산도 하지 않는 날들이 이어진다.


청년세대는 더 빨리 질린다


MZ세대의 직장 생활 적응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일을 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막상 조직에 들어오면 ‘일하는 척’을 요구받는다.

그들은 의미와 효율을 중시하지만, 조직은 형식과 상명하복을 강요한다.


한 스타트업에 입사한 신입사원 C씨는 입사 3개월 만에 퇴사를 결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업무가 비효율적인 건 괜찮아요. 그런데 왜 그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의견을 내면 윗사람이 기분 나빠해요. 결국 나는 의미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일을 시키는 대로 반복하고 있었어요.”


이러한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빠르게 ‘심리적 퇴사자’가 되게 만든다.

조직은 이들을 게으르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들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을 뿐이다.

일에 대한 철학이 없는 조직은 구성원에게 일에 대한 애정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일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가


‘월급 루팡’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병든 구조가 만들어낸 예고된 결과다.

진짜 문제는 ‘일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지 않아도 티가 나지 않는 구조’에 있다.


이제 한국 사회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 조직에서 하는 일은 실제로 필요한가?

이 회의는 꼭 필요한가?

이 보고는 어떤 성과와 연결되는가?

우리는 진짜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이미 ‘가짜 노동’에 너무 익숙해진 것이다.


진짜 노동을 위한 전환


조직은 변해야 한다.

성과를 측정하는 방법,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식, 회의와 보고의 빈도와 목적,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정의해야 한다.


불필요한 회의 줄이기

보고 형식 단순화

정량보다 정성 중심의 성과 평가 도입

‘존재’보다 ‘결과’를 보는 문화 조성

일의 목적을 구성원과 공유하는 시스템


이러한 변화는 단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 아니다.

그것은 ‘일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자, 인간답게 일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결론: ‘월급 루팡’을 탓하기 전에, 거울을 보라


《가짜 노동》은 묻는다.

“우리는 정말 일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한국 사회의 조직들에도 고스란히 던져져야 한다.


‘월급 루팡’은 게으름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이 만든 그림자이며, 의미 없는 일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그들을 탓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조직을 들여다봐야 한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 속에서, 누가 일하고 싶겠는가?


진짜 일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일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루팡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그 이름으로 불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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