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이후: 지식, 권력, 그리고 문화의 재구성

거대 서사의 해체에서 새로운 사유와 상상력의 가능성까지

by 안녕 콩코드



서문: 지식은 여전히 힘인가


지식은 한때 진보와 해방의 이름으로 불렸다. 계몽주의가 이성을 찬양하며 무지를 몰아낼 때, 지식은 인간을 구원할 열쇠로 여겨졌다. 과학은 진리를 향한 가장 강력한 도구였고, 역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은 여전히 ‘힘’인가, 혹은 그 힘은 이미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많은 지식―혹은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검색창 하나로 전 세계의 데이터를 호출할 수 있고,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학습한다. 지식의 양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 방향과 깊이는 오히려 흐릿해졌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관심을 선별하고, 유튜브는 확증 편향을 강화하며, 정치적 논쟁은 사실이 아닌 감정의 진영에서 벌어진다. 지식은 진실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영향력을 확보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자산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다시 떠오르는 책이 있다. 1979년,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근대가 신봉하던 ‘거대 서사’―진보, 이성, 해방―에 대한 불신의 시대를 선언했다. 그는 지식의 정당화가 더 이상 도덕이나 보편적 이성이 아닌, 기술적 유용성에 따라 평가되는 조건을 분석했다. 이는 정보화 시대를 앞두고 지식의 위상 변화, 그 내면의 균열을 예견한 통찰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조건의 가장 극단적인 풍경을 목도하고 있다. AI는 질문의 구조를 바꾸고, 데이터는 권위의 새로운 근거가 되었으며, 인간의 판단은 기계와의 효율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가’다. 지식은 공적 토론의 자산이 아니라, 시장 논리 아래 분배되는 상품으로 변모했다. ‘무엇이 진실인가’보다는 ‘어떤 담론이 더 퍼지는가’가 문제인 시대. 지식은 여전히 힘이지만, 그 힘은 더 이상 진리를 향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리오타르를 다시 읽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권력·기술이 얽힌 오늘의 삼각지대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단순한 시대 진단서가 아니라, 지식의 정치성과 정당화 조건을 다시 묻도록 이끄는 철학적 도구다. 정치가 감정의 소비로 전락하고, 언론이 신뢰를 잃으며, 과학마저 특정 입장에 포획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한다. 지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사유할 수 있는가?


리오타르가 말했듯, 진리는 거대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언어 게임들 사이에서 충돌하고 어긋나며, 때때로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무엇이 진리인가?”에서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말할 수 있는가?”로. 이 질문으로부터 다시 사유는 시작된다. 지식은 여전히 힘이다. 그러나 그 힘의 방향은, 우리가 다시 묻지 않는 한, 결코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1장. 포스트모던은 무엇을 해체하는가?

– 거대 서사의 몰락과 파편화된 인식의 시대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이야기로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혹은, 세계를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는 시대라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선언한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은 단지 철학 사조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의 전환을 뜻한다.


근대는 이야기의 시대였다. 인간은 개선될 수 있고, 세계는 이해 가능하며,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 아래, 철학과 과학, 예술과 정치 모두 일정한 방향성을 공유했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통해 무지를 몰아내고자 했고, 자유주의는 자율적 개인의 선택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 했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역사 유물론을 통해 해방의 미래를 예언했다. 이들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진보’와 ‘해방’이라는 목적론적 서사를 기반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이러한 서사들은 20세기 들어 점차 그 설득력을 잃어갔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과학과 기술이 진보의 도구이기 이전에 파괴와 학살을 가능케 했음을 드러냈고, 식민주의는 보편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폭력의 역사를 드러냈다. 더 이상 진보와 해방이라는 말은 모든 이의 삶을 설명해 줄 수 없었다. 리오타르가 말한 “거대 서사의 몰락”은 이러한 역사적, 윤리적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리오타르는 모든 진리는 정당화의 문제이며, 정당화는 결국 ‘언어 게임’의 규칙 속에서 작동한다고 보았다. ‘진보’라는 말은 특정한 정치적 맥락에서, ‘이성’은 제도화된 학문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는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진리는 자율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맥락적이고, 제도화된 규칙 속에서 구성된다. 근대는 이러한 구조를 감춘 채 보편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해 왔고, 포스트모던은 바로 그 감추어진 권력 장치를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젠더, 인종, 계급, 종교, 지역 등의 정체성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말하고, 그것은 더 이상 하나의 언어로 통합되지 않는다. 억압된 목소리들이 등장한 것은 분명한 진전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공통된 감각과 기준이 사라진 시대의 불안도 함께 마주한다. 말은 넘쳐나지만, 듣는 이는 점점 줄어들고, 공통의 진실은 멀어진다.


여기에 후기 자본주의의 양면성이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실증주의와 기술 중심주의가 지배한다. 알고리즘에 의한 분류와 판단, 수치화된 효율성과 성과 중심 사고는 오늘날 의사결정의 표준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규범과 진리가 무너진 해체주의적 감각이 일상화되었다. 모든 것이 측정 가능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 포스트모던은 바로 이 실증성과 불확실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모순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반드시 제기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거대 서사의 붕괴 이후, 우리는 무엇을 기준 삼아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만약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진리는 각자의 ‘버전’으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옳음’과 ‘그름’, ‘책임’과 ‘의무’를 말할 수 있는가? 리오타르는 언어 게임 간의 차이를 강조했지만, 그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윤리적 공통 기반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우회한다.


포스트모던은 해방을 가능케 했다. 억압적 보편주의를 해체함으로써 다양한 주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그러나 해체가 곧 해방은 아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이후, 새로운 기준과 윤리적 책임의 자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포스트모던은 해체를 제안했지만, 재구성의 철학은 충분히 제시하지 않았다. 이 지점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오타르의 작업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진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지식의 정치성과 정당화의 조건을 문제화했다. 특히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어떤 말이 억압당해 왔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와 다양성 담론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거대 서사가 지워버린 존재들의 경험을 다시 불러오는 데, 리오타르의 해체는 결정적인 철학적 계기였다.


하지만 다시 묻게 된다. 그 모든 말들이 동등한 지위를 주장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책임질 수 있는가? 진리의 파편화는 때로는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지고, 윤리적 무기력을 낳는다. 진리는 절대일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타인을 향한 책임을 요청하는 순간, 다시 구성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포스트모던이 남긴 가장 날카로운 질문 앞에 서 있다. “모든 서사가 해체된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윤리를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단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교육, 미디어, 공동체가 직면한 현실적 문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공통의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공유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단일한 서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야기들 사이에서 책임 있게 응답하려는 태도에서 출발할 수 있다.


결국, 포스트모던은 무엇을 해체했는가? 그것은 근대를 지탱하던 중심 개념들—진보, 이성, 보편, 해방—을 해체했고, 진리의 정당화 구조를 문제화했다. 하지만 진리는 해체 이후에도 다시 말해져야 하며, 윤리 또한 상대주의의 늪에 빠지지 않고 새롭게 사유되어야 한다. 해체는 종말이 아니라, 다시 사유하고 다시 책임지는 시작의 공간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시대의 철학이 된다.


2장. 언어 게임의 시대: 지식은 누구의 게임인가?

– 담론의 다원성과 정당화의 붕괴


우리는 매일 다른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 다른 규칙과 맥락에서 작동하는 수많은 ‘언어 게임’ 속을 오가며 사고하고 말한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제시한 이 개념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지식과 진리, 정당화가 더 이상 단일한 기준에 의해 결정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은유다. 과학, 예술, 정치, 법, 심지어 일상 언어까지—각 영역은 고유의 규칙과 평가 기준을 지닌 별개의 언어 체계이며, 그 안에서만 의미가 성립된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근대는 진리를 통합된 체계로 이해하고자 했다. 과학적 방법은 자연의 질서를 설명하고, 이성은 윤리의 기준을 제공하며, 정치는 합리적 토론을 통해 공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이러한 통합적 사유를 의심한다. 진리는 이제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그 각각은 서로 다른 게임의 규칙에 따라 작동한다. 과학은 ‘증거’로, 예술은 ‘창조성’으로, 정치는 ‘동원력’으로, 법은 ‘합법성’으로 정당화된다. 이들은 더 이상 하나의 틀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러한 언어 게임의 다원성은 억압적 보편성을 넘어서는 철학적 진보로 읽힐 수 있다. 다양한 시선과 기준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지식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조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각한 정당화의 위기가 도사린다. 서로 다른 언어 게임은 서로를 정당화하거나 조율하지 못한 채 병렬적으로 존재하고, 이로 인해 공통된 판단이나 합의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와 SNS의 확산은 리오타르의 이론을 급진적으로 현실화시킨다. SNS는 각자의 ‘버전’을 갖는 발언들이 폭발적으로 생성되고 충돌하는 장이다. 여기서 진실은 더 이상 본질적 가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이 더 널리 확산되는가, 얼마나 많은 ‘좋아요’를 얻는가이다. 과학적 주장조차도 클릭 수와 반응률에 따라 주목받고 소비된다. 정당성이나 타당성은 점점 후퇴하고, ‘도달 범위’와 ‘영향력’이 지식의 기준이 되는 사회. 리오타르가 말한 정당화의 붕괴가 디지털 공간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이제 언어는 점점 더 게임이 된다. 발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진리의 추구가 아니라, 참여 유도와 영향력 확대로 이동한다. 댓글은 논의의 공간이 아니라 감정의 투표장이 되고, 해시태그는 논리의 연결점이 아니라 정체성의 신호로 기능한다. 말의 무게는 사라지고, 반응성과 가시성이 지배한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이 현상을 들여다보자.


사례 ①: SNS 정치 – 정당성의 축소, 감정의 극대화


정치 담론이 SNS로 이동하면서, 정책의 내용보다는 발언의 톤과 이미지, 정체성 코드가 더욱 중요해졌다. 발언의 논리보다 정서적 자극이 더 많은 반응을 유도하고, 정치적 의사소통은 공론장이 아니라 콘텐츠 경쟁의 장이 되었다. 정치가 하나의 언어 게임이 되었을 때, 정당성은 사라지고, 감정적 동원이 승패를 가른다.


사례 ②: 댓글 문화 – 공론장의 왜곡과 반응의 자동화


댓글은 민주적 참여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단적 반응을 유도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논리보다는 자극이, 경청보다는 속도가 반응을 이끈다. 포스트모던의 언어 게임은 여기서 ‘감정적 발화’라는 새로운 규칙을 획득한다. 누가 옳은가 보다 누가 더 많이 분노하고, 더 짧게 말하는가가 중요해진다.


사례 ③: 알고리즘 추천 – 반복되는 확신, 선택된 세계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취향과 반응을 분석해 선호하는 정보만을 반복해 보여준다. 사용자는 점점 더 익숙한 것, 동의할 수 있는 것만 보게 되고, 다른 언어 게임의 세계는 차단된다. 그 결과, 다양한 진리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자기 확신’들이 단절된 채 병렬로 존재하는 사회가 형성된다.


이처럼 디지털 사회는 언어 게임의 다원성을 확대했지만, 동시에 이질적 언어 간의 소통 가능성은 극도로 축소시켰다. 지식은 공적 토론의 자산이 아니라, 플랫폼 위에서 유통되는 콘텐츠가 되었고, 진리는 정당화의 대상이 아니라 주목받기 위한 전략적 장치로 변질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다원적 언어 게임의 시대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리오타르는 어떤 하나의 담론이 다른 담론을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차이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각 언어 게임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 속의 권력 구조를 드러내는 비판적 감수성이다. 어떤 말이 선택되고, 어떤 말이 지워지는가. 누가 규칙을 정하고, 누가 그 게임에서 배제되는가.


이제 우리는 묻기 시작해야 한다. 단지 누가 말하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말이 들리는가, 그 말은 어떤 규칙에 따라 의미를 획득하는가, 그 규칙은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가. 리오타르의 언어 게임 개념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매일 접속하는 현실의 구조 그 자체다.


포스트모던은 언어의 권력을 드러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그 언어 게임의 규칙을 재설계할 수 있는가, 혹은 최소한 그 규칙을 성찰하고 저항할 수 있는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진실은 단일한 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가 충돌하고, 협상하고, 실패하면서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수 있다. 그 불안정한 장면을 견디는 것, 그 안에서 다시 지식을 요청하고 진리를 묻는 것. 그것이 우리가 포스트모던 이후를 살아가는 한 가지 방식일지 모른다.


3장. 대학, 지식, 시장: 기술적 정당화의 시대

– 진리의 권위에서 ‘효율성’의 권위로


근대 사회에서 대학은 지식의 생산과 전파를 책임지는 중심지였다. 진리를 탐구하고 비판적 사유를 키우는 장으로서, 대학은 사회의 지적 성찰과 문화적 발전을 이끄는 산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은 순수한 지식의 요람이 아니라, 시장 논리에 깊이 편입된 기술적 효율성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경고한 ‘기술적 정당화’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대학이다.


대학의 시장화와 지식 생산의 변질


과거 대학은 지식의 가치와 진리의 권위를 전제로 운영됐다. 학문의 자유와 비판적 토론은 대학의 핵심 원칙이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특히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대학은 ‘경쟁’과 ‘성과’에 의해 평가받는 시장의 한 축으로 편입됐다. 교육은 상품화되고 학생은 소비자가 되었으며, 연구 성과는 투자 대비 수익으로 환산된다.


이러한 변화는 대학의 본질적 기능을 크게 훼손했다. 지식은 더 이상 공공의 이익과 비판적 사고를 위한 자산이 아니라, 경제적 효용과 기술적 활용 가치에 의해 평가받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교수들은 논문 수, 연구비 확보, 산학협력 실적 등 수치화된 지표로 경쟁하고, 커리큘럼은 취업률과 직결되는 실용 지식 중심으로 개편된다.


기술지식과 실용지식의 지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리오타르는 지식이 ‘기술적 정당화’—즉 ‘유용성’과 ‘효율성’에 기반해 평가된다고 진단했다. 오늘날 대학은 이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순수학문이나 인문학적 탐구는 ‘비효율적’ 영역으로 밀려나고, 인공지능, 빅데이터, 공학, 경영 등 ‘기술 지식’이 우선시 된다.


이는 지식의 다원성과 학문의 풍요로움을 오히려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대학이 생산하는 지식이 시장 수요에 맞춘 ‘상품’으로 전락할 때, 비판적 사유와 상상력, 윤리적 성찰은 주변화된다. 효율성과 실용성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지만, 그 기준은 지식의 본질적 의미와 사회적 책임을 희생시키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비판적 사유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기술 중심 사회에서 비판적 사유의 위기는 심각하다.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지만, 그 안에서 진정한 사유와 성찰은 점점 사라진다. 대학은 ‘효율성’과 ‘시장성’에 갇히고, 학생들은 ‘성과’와 ‘스펙’에 몰두한다. 이 과정에서 자율적 사고와 사회비판 능력은 부차적 가치로 취급된다.


그러나 비판적 사유는 단순한 학문적 취미가 아니다.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사회를 위해 구성원이 주체적으로 현실을 성찰하는 힘은 필수적이다. 대학이 이 역할을 상실하면, 사회 전체의 지적 기반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오늘날 ‘지식의 기술화’는 효율성과 편리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지식을 권력과 시장에 복무시키는 경향을 강화한다. 이는 곧 ‘지식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대학의 미래와 지식의 자리


대학은 기술적 정당화의 압력 속에서도 비판적 사유와 공공성의 공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한다. 진리와 효율성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며, 지식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유의 장’임을 복원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술과 시장은 대학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것들이 대학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지식이 효율성에 종속되는 순간, ‘생산성 높은 지식’과 ‘사유하는 인간’ 사이 간극은 더욱 벌어진다. 미래 대학은 다시 ‘비판적 사유’와 ‘윤리적 성찰’의 중심으로서, 시장 논리를 넘어선 새로운 의미의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


4장. 정보는 자유인가 억압인가?

– 포스트모던 정보 사회의 역설


우리는 지금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세계 곳곳의 방대한 정보가 손끝에 닿고, 누구나 쉽게 지식을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지식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듯 보인다. 권위적 매체와 엘리트 중심의 지식 독점이 무너지고, 다양한 목소리가 공론장으로 진입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보의 과잉과 혼란, 그리고 통제의 새로운 양상도 자리한다. 포스트모던 정보 사회는 ‘자유’와 ‘억압’, ‘개방’과 ‘통제’가 뒤엉킨 역설적 공간이다. 정보의 자유는 동시에 정보의 억압으로, 지식의 민주화는 진실의 붕괴로 작동하기도 한다.


지식의 민주화와 정보 과잉


인터넷과 SNS는 전통적 권력 구조를 흔들고, 누구나 쉽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했다. 이는 지식 접근의 장벽을 낮추고, 소수 엘리트의 독점 체제를 해체했다. 그러나 동시에 정보는 무한히 생산되고 소모되며, 양적으로 폭발했다. 정보의 과잉은 선택과 집중을 어렵게 만들고, 정보 피로와 혼란을 낳는다.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편향된 채널과 필터를 통해 걸러지며, ‘확증 편향’과 ‘에코 챔버’ 현상은 갈수록 심화된다. 정보 홍수 속에 진짜와 가짜, 사실과 허구가 혼재하면서 대중의 판단력은 약화되고 있다.


포스트모던과 포스트트루스(Post-truth)의 관계


포스트모던은 진리를 하나의 거대 서사로 보지 않고, 다원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 철학적 관점은 권위와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를 심화시키며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장점을 낳았다. 그러나 모든 주장이 평등하게 ‘진리’일 수 있다는 상대주의가 퍼지면서 객관적 사실과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진실이 약화되는 부작용도 생겨났다.


이는 ‘포스트트루스’—즉 ‘사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신념이 여론을 좌우하는 시대’—의 도래와 맞닿아 있다. 진실은 더 이상 공공의 합의가 아니라, 정서적 동원과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재구성된다.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논쟁은 줄어들고, ‘나의 믿음’과 ‘우리 편의 이야기’가 힘을 얻는다. 포스트모던의 언어 게임과 정당화 붕괴가 포스트트루스의 토양이 된 셈이다.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빅데이터 시대의 통제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오늘날 자본주의가 ‘다른 체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며 대안적 상상력을 억압한다고 지적했다. 이 ‘현실주의’는 정보 사회에도 적용된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은 우리 삶 구석구석을 데이터화하며 무수한 선택과 행동을 예측·조작한다. 개인의 취향과 행동 패턴은 수집되어 광고와 정치 메시지에 활용되고, 사회적 신념까지 특정 방향으로 유도된다. 이는 자유로운 정보 소비가 아니라 ‘맞춤형 정보 통제’의 실체다.


빅데이터 시대의 정보 통제는 과거 권위적 검열과 다르다. 표면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이 보장되지만, 알고리즘이 보이지 않는 경계를 설정하고, 다원성은 ‘선택적 다양성’으로 축소된다. 정보 소비자는 자신의 취향과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반복적으로 접하며, 반대 의견은 배제된다.


정보사회, 자유와 억압의 긴장


정보사회는 자유와 억압, 개방과 통제가 공존하는 모순적 공간이다. 정보의 민주화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무엇이 진실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혼란과 불안을 동반한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은 정보를 대량 생산·소비하게 만들면서, 선택과 판단의 권한을 사실상 빼앗고 있다.


따라서 정보는 단순한 자유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권력과 통제, 그리고 무기의 역할을 한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를 지키고, 진실을 찾아내며, 비판적 시선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5장. 포스트모던성과 윤리: 모두가 다르다면,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 다원성과 상대주의, 그 윤리적 딜레마


포스트모던 사상은 다원성과 다양성, 차이를 존중하는 철학이다. 전통적 근대가 강조했던 보편적 진리와 절대적 규범에 대한 의심과 해체는 한편으로 억압받던 소수와 주변화된 목소리의 해방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고 ‘진리’가 분산된 사회에서, 윤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다름을 인정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회가 맞닥뜨린 가장 근본적이고 긴급한 윤리적 딜레마다.


절대가 없는 사회에서 공존은 가능한가


근대 사회는 보편적 규범과 절대적 가치를 바탕으로 질서와 공존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이러한 ‘거대 서사’와 보편성에 의문을 던지며, 모든 가치와 진리를 다원적이고 맥락적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절대’가 해체된 사회에서는 각자의 언어 게임과 문화적 담론이 공존하지만, 그들 사이에 절대적인 조정자나 공통된 윤리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서로 다른 가치와 규범이 충돌하며, 다름이 ‘차별’과 ‘배제’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절대적 기준 없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윤리적 실천과 사회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지 의문이 제기된다.


규범 없는 자유, 윤리 없는 다양성에 대한 경고


다원성과 상대주의는 자유와 차이의 존중이라는 긍정적 가치를 담지만, 동시에 규범 부재와 윤리적 혼란이라는 위험을 내포한다. 무한한 자유와 상대적 가치는 때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방임과 무책임으로 이어지기 쉽다. 규범이 사라진 자리에서 권력과 강자의 논리가 강화되고, 약자는 다시 소외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윤리학자들은 이러한 위험을 경계하며, 다원성과 자유를 인정하되 ‘책임 있는 자유’와 ‘상호 존중’의 윤리를 모색한다. 즉,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하며,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는 최소한의 윤리적 합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례: 혐오 표현과 사회적 정체성 투쟁


현대 사회에서 혐오 표현과 차별적 발언은 다원성과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윤리적 긴장을 일으킨다. ‘모두 다르다’는 전제 아래, 특정 집단을 배제하거나 공격하는 언어가 자유롭게 허용될 때, 사회적 연대는 깨지고 공동체는 분열된다. 혐오 표현 문제는 단순한 개인 자유의 영역을 넘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존엄성과 안전에 관한 윤리적 문제다.


또한, 성별, 인종, 성적 지향, 계급 등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을 둘러싼 투쟁은 다원성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러한 투쟁은 기존 권력 구조와 규범에 도전하며 새로운 윤리적 요구를 제기하지만, 때로는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배제하거나 적대시하는 역설도 낳는다. ‘다름’에 대한 존중과 ‘공존’을 위한 규범이 균형을 잃으면, 상대주의는 무기력과 분열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정치적 무기력과 윤리의 위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윤리적 딜레마는 정치적 무기력으로도 드러난다. 모든 가치가 상대적이라면, ‘옳음’에 대한 공통 합의와 행동의 동력이 약화된다. 이는 시민사회와 정치를 냉소와 분열로 내몰며, 사회 갈등 조정에 장애가 된다.


정치적 무기력은 개인과 집단 모두의 책임 회피와 무관심으로 이어지기 쉽다.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 방향을 잃은 사회는 갈등 해결을 위한 새로운 규범과 실천을 찾아야 하지만,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는 그 과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포스트모던 윤리의 길


포스트모던성은 다원성과 상대주의라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온 윤리적 혼란과 딜레마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전제를 넘어,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윤리 원칙과 실천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규범 복귀가 아니다. 지속적인 대화와 타협, 그리고 상호 책임에 기반한 윤리다. 서로 다른 언어 게임과 담론이 충돌하는 가운데, 최소한의 ‘공통선’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윤리는 ‘정해진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협력하며 조정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우리의 윤리적 과제는 결국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이다. 그 해답은 ‘다름’에 대한 인식과 존중에서 시작해, ‘함께’라는 가능성을 열어가는 성찰과 실천에 있다.


6장. 리오타르 이후의 리오타르: 비판과 계승

– 현대 철학자들과의 대화 속 리오타르의 위치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는 1979년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통해 근대 ‘거대 서사’의 붕괴와 지식, 진리의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며 포스트모던 사상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간 그의 사상은 다양한 철학자들에 의해 비판과 계승을 거치며 풍부한 논의의 장을 이루었다. 이 장에서는 리오타르가 현대 철학의 주요 사상가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있는지, 그의 사상이 어떤 비판과 재해석을 거쳤는지 살펴본다.


리오타르 vs. 하버마스: 소통적 이성의 가능성


위르겐 하버마스는 근대성의 합리성과 소통 이성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대표한다. 그는 『이성의 구조 변동』에서 근대 사회가 가진 합리성의 잠재력을 재조명하며, ‘소통 행위’를 통해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 형성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거대 서사 몰락 이후에도 이성적 담론과 민주적 의사소통이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리오타르는 근대 이성 중심주의가 하나의 지배적 서사로 작동해 다양한 차이와 목소리를 억압했다고 비판하며, 보편적 합의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그는 다원적 언어 게임들의 공존을 강조하며, 보편성의 부재를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두 사상가의 대립은 포스트모던 이후 정치적·윤리적 실천 가능성을 두고 이어진다. 하버마스가 ‘소통적 합리성’으로 민주주의와 사회 통합을 모색한다면, 리오타르는 다원적 담론이 공존하는 조건에서 공통 윤리 토대를 찾는 일이 매우 어렵다고 본다. 이는 다문화 사회와 정치적 분열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쟁점이다.


리오타르 vs. 지젝·바디우: 새로운 보편성에 대한 사유


슬라보예 지젝과 알랭 바디우는 리오타르의 상대주의적 다원성 한계를 넘어 ‘새로운 보편성’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과 헤겔 철학을 바탕으로, 포스트모던적 분열과 파편화 속에서도 ‘진리의 사건(event)’이 개입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진리가 단지 언어 게임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 정치 행위나 사회 변혁의 순간에서 탄생한다고 본다.


바디우는 정치, 예술, 사랑, 과학 네 영역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충실함으로써 새로운 보편적 진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포스트모던이 기존 체제 비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리오타르와 지젝·바디우의 논쟁은 분열과 다원성 속에서 ‘새로운 진리’와 ‘보편성’이 가능한지에 대한 철학적 긴장을 드러낸다. 이는 현대 정치철학과 사회운동, 윤리학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리오타르 vs. 브루노 라투르: 지식과 세계의 구성 방식


브루노 라투르는 과학기술학 분야에서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을 창시하며, 지식과 사회,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지식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가 얽힌 네트워크 속에서 ‘구성’된 결과라고 본다. 이는 리오타르의 ‘언어 게임’ 개념과 맞닿으면서도,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사회과학적 탐구로 확장된다.


라투르는 근대의 주관-객관, 자연-사회 이분법을 해체하고, 과학·기술·정치·경제가 얽힌 복잡한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가 구성된다고 본다. 이는 리오타르가 강조한 다원적 담론의 상호작용을 구체적인 사회적 네트워크 차원에서 설명한 셈이다.


리오타르가 언어와 담론의 다원성을 강조했다면, 라투르는 이 다원성이 실제 행위자 네트워크 내에서 어떻게 실천되고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두 사상은 지식과 권력, 현실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리오타르 이후, 사유의 다층적 확장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근대 지식과 권력의 재구성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상대주의와 거대 서사 해체는 다양한 철학자에 의해 비판과 계승을 거쳐, 포스트모던 이후 철학 담론은 더욱 다층적이고 복잡해졌다.


하버마스와의 대화에서는 소통과 합리성의 가능성을, 지젝·바디우와의 대화에서는 새로운 보편성 모색을, 라투르와의 대화에서는 지식과 세계 구성의 실천적 네트워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 모두 리오타르의 사유를 바탕으로, 동시에 한계를 극복하며 현대 철학의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다.


오늘날 리오타르는 더 이상 고립된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현대 철학자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지식·권력·진리·윤리에 관한 우리 시대 복잡한 질문에 답하는 데 필수적인 사유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7장. 포스트모던의 조건과 오늘의 문명: 어떤 문화적 상상력이 가능한가

– 기술, 예술, 정치의 재배치


포스트모던은 근대의 거대 서사를 해체하고, 다원적이고 파편화된 세계 인식을 드러내며 현대 문화와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기술과 예술, 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포스트모던적 감각과 태도 역시 재배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이 장에서는 포스트모던이 제기한 문제들을 바탕으로 오늘날 문명이 마주한 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해 본다.


포스트모던적 감각과 현대 예술의 실험


포스트모던은 예술 영역에서 다양한 실험과 파격을 촉발했다. 장르와 매체의 경계를 허물고, 고전과 대중문화, ‘고급’과 ‘저급’의 구분을 해체했다. 또한 아이러니와 패러디, 시뮬라크르, 탈맥락화 등의 기법은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들었다.


21세기 들어 디지털 기술과 네트워크가 확산되면서 예술은 더욱 유연해지고 경계를 넘나 든다. 인공지능이 창작에 참여하고, VR·AR 같은 몰입형 기술이 경험의 영역을 확장하며, 소셜 미디어는 예술과 대중의 관계를 새롭게 재편한다. 이러한 변화는 포스트모던적 ‘경계 해체’ 감각을 더욱 심화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문화적 실험의 장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의 상업화와 대중화, 알고리즘에 의한 취향 규격화, 대량 소비문화의 압력은 포스트모던 예술의 실험정신을 위협한다. 예술이 시장과 기술의 논리 속에 재편되는 이중적 상황에서, 현대 예술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혁신을 요구받는다.


정치적 허무주의를 넘어설 대안은 존재하는가?


포스트모던 사상은 기존 정치적 거대 서사를 해체하며 ‘정치적 허무주의’ 혹은 무기력으로 비판받는다. 권위와 진리, 보편적 가치의 붕괴는 정치적 합의와 실천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냉소주의와 분열을 심화시켰다.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 정보 권력, 포퓰리즘, 정체성 정치가 복합적으로 얽힌 정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갈등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허무주의를 넘어설 대안은 무엇일까?


한편에서는 하버마스적 소통이성이나 공공 영역의 회복을, 다른 한편에서는 지젝과 바디우가 주장하는 혁명적 사건과 보편성의 재발견을 제시한다. 또한 환경 위기, 디지털 민주주의, 사회적 연대와 공감 윤리 같은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도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포스트모던적 해체를 넘어 정치적 의미와 실천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어떤 대안도 쉽지 않으며, 복잡하고 다층적인 사회 현실과 문화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인 사유와 행동이 요구된다.


탐색적 제안: ‘서사의 귀환’은 가능한가? 탈포스트모던 이후의 감각


포스트모던의 핵심은 ‘거대 서사’의 해체였다. 하지만 최근 문화와 사회 전반에서 ‘서사’의 재등장이 감지된다. 이는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서사’다.


‘탈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포스트모던’ 담론에서, 분열과 파편화의 시대에 ‘연결’, ‘통합’, ‘공동체’ 가능성을 다시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 문학, 대중문화는 개인과 사회, 기억과 정체성을 엮는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며, 정치적·사회적 대화의 장을 넓히려 한다.


기술적으로는 빅데이터와 AI가 방대한 정보를 연결해 새로운 의미망을 만들고, 사회적으로는 네트워크 기반 협력과 공유 문화가 확산하며 ‘서사’는 다층적이고 유연한 형태로 돌아온다.


이 움직임은 포스트모던이 남긴 다원성과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면서도, 공동의 이해와 연대, 미래를 위한 상상력 회복을 지향한다. ‘서사의 귀환’은 과거 거대 담론과 달라도, 오늘날 문명이 직면한 복잡한 문제 해결의 중요한 문화 자원이 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이후, 문화적 상상력의 과제


포스트모던은 근대의 틀을 해체하며 새로운 감각과 사유의 장을 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늘날 문명이 직면한 기술, 예술, 정치의 도전과 문제를 온전히 설명하거나 해결하지 못한다.


기술이 삶과 예술을 재배치하고, 정치가 허무주의와 갈등을 넘어설 대안을 모색하며, ‘서사’가 다원성과 연결을 아우르는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되는 지금, 우리는 포스트모던 이후 시대의 문화적 상상력과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파편화된 현실 속에서 의미를 찾고, 다름과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또한 기술과 인간, 예술과 사회, 정치와 윤리가 긴밀히 엮여 작동하는 복잡한 문명 속에서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가는 창조적 도전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위에 서서, 우리는 오늘의 문명을 재해석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문화적 상상력과 윤리를 다시 묻고 만들어가야 한다.


에필로그: 더 이상 “탈 것”은 없는가?

포스트모던이라는 진단 이후의 사유


포스트모던은 20세기 후반 근대성에 대한 결정적인 진단으로 등장했다. 거대 서사의 해체와 진리, 정당화, 보편성의 붕괴를 선언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그 진단 이후, 우리는 ‘더 이상 탈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와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다. 이제 묻고자 하는 것은 과연 그럴까, 우리가 진정 ‘탈 것’을 잃었는가 하는 점이다.


탈근대 이후, 정당화의 위기와 새로운 탐색


리오타르가 말한 ‘정당화의 붕괴’는 기존 보편적 합리성과 도덕적 토대의 상실을 의미했다. 전통적 가치가 해체되고, 지식은 기술적 효율성과 전략적 유용성으로만 평가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기존 삶의 기준을 흔드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 충격 속에서 새로운 정당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오늘날 사회에서 ‘정당화’는 더 이상 단일한 서사나 이성에 의존하지 않고, 다원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민주적 토론, 사회적 합의, 감정과 윤리의 재발견, 그리고 지역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다층적 정당화가 그것이다.


이 새로운 정당화는 완전한 보편성을 회복하기보다, 불확실성과 다양성을 품고 공통의 삶의 조건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정당화의 붕괴’는 끝이 아니라, 변형과 재구성의 출발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다시 ‘탈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공통감각의 재발견과 사회적 연결


포스트모던 이후 사회는 분열과 파편화, 개인주의 심화라는 현실을 맞았다. 정보와 연결의 시대임에도 우리는 고립과 단절을 경험한다. 소셜 미디어가 수많은 연결을 만들어내지만, 정작 진정한 소통과 공감은 빈약한 역설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새로운 ‘공통감각’의 모색은 멈추지 않는다. 팬데믹, 기후 위기, 사회 불평등 문제는 공동 대응과 연대를 요구한다. 이는 개인을 넘어서는 사회적 주체의 회복을 뜻한다.


철학자들은 ‘공통감각(common sense)’이 단순한 합의가 아니라, 다원성과 차이를 수용하면서도 상호작용 가능한 삶의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 거대 서사와 달리, 소규모 서사와 미시적 실천이 엮여 만들어내는 복합적 공감의 지평이다.


정보, 감시,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이중성


정보기술 발전은 자유와 억압, 연결과 감시의 이중적 양상을 드러낸다. 빅데이터와 AI는 삶을 편리하게 하지만, 동시에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도 크다. 우리는 ‘정보의 자유’와 ‘정보의 억압’ 사이 복잡한 갈림길에 서 있다.


이 이중성은 인간 존재의 새로운 조건이기도 하다. 디지털 네트워크 속 우리는 연결되지만, 동시에 데이터를 통해 규정되고 한정된다. 다양성과 해체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정체성은 유동적이고 분열적이다.


하지만 이 조건이 인간성 상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이 더욱 중요해졌다. 포스트모던 이후 인간 존재는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자유와 억압, 소통과 고립이 함께 엮여 있다.


사유의 ‘탈 것’을 찾아서


포스트모던의 진단은 ‘더 이상 탈 것이 없다’고 말한 듯 보였지만, 그것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질문이기도 했다. 보편성과 정당화가 붕괴된 시대, 우리는 다시 무엇을 믿고, 어떤 기준으로 함께 살아갈 것인가.


새로운 정당화 방식과 공통감각의 복원, 정보와 감시의 이중성 속 인간 존재 조건을 직시하며, 우리는 ‘탈 것’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은 전통적 안정적 질서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다층적이며 복잡한 삶의 실천 속에서 발견되는 사유의 도구이자 윤리적 가능성이다.


이 여정은 쉽지 않지만, 포스트모던의 해체적 진단을 넘어 새로운 문명을 상상하고 만드는 길이다.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 ‘탈 것’을 향한 사유와 실천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참고


“탈 것이 없다”는 표현은 포스트모던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 전통적이고 확고했던 ‘거대 서사’나 ‘확실한 기준’이 해체되어 더 이상 흔들림 없이 의지할 만한 기반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과거에는 사회적·문화적 삶을 지탱해 온 보편적 가치, 이념, 진리 등이 존재했지만, 포스트모던은 이러한 ‘거대한 탈 것’—기준, 원리, 진리, 정당화 구조—의 붕괴를 진단하며, 우리는 이제 어디에 의지해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기 어려운 시대에 놓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동시에 “새로운 ‘탈 것’(기준이나 의미 체계)을 찾아야 한다”는 질문과 도전을 내포하기도 합니다. 즉, ‘탈 것이 없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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