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오어낫씽(All or Nothing), 현대인의 병리

성공 신화와 파괴적 비교의 시대

by 콩코드


최고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시대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이라는 사고방식이 오늘날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해 있다. 최고가 아니면, 1등이 아니면, 모두 실패자로 취급하는 문화는 어느새 경쟁과 비교의 논리를 넘어 개인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병들게 만들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몰락하는 자』 속에서 주인공이 겪는 절망 ― "글렌 굴드보다 뛰어날 수 없다면, 피아노를 포기하겠다" ― 는 현대인의 현실에서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성공 서사’로 대표되는 이 사회의 이야기 구조 속에 살아간다. 최정점에 도달하지 못한 삶은 불완전하며, 보통 혹은 평균은 실패처럼 여겨진다. 인스타그램 속 타인의 성공, 화려한 경력, 완벽한 몸매, 눈부신 일상이 끊임없이 비교 대상으로 떠오르는 시대. 여기에서 개인은 오직 ‘모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그렇게 ‘올 오어 낫씽’은 현대인의 병리로 기능한다.


비교와 자기혐오가 낳은 병리적 태도


현대 사회가 조장하는 이 극단적 태도는 일종의 자기혐오 산업과 맞닿아 있다. SNS는 끊임없이 비교 대상을 제공하고, 기업들은 "지금의 너는 불완전하다"는 불안을 부추기며 완벽한 소비, 완벽한 몸, 완벽한 라이프스타일을 팔아넘긴다. 개인은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한 채 끊임없이 타인의 기준에 맞춰 스스로를 재단한다.


문제는 이런 ‘올 오어 낫씽’의 태도가 결국 실패와 좌절을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조금씩 나아가고, 시행착오하며, 평균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능력은 사라진다. 대신 최고가 아니라면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긴다. 이는 개인적 우울, 번아웃, 자살 충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오늘날 MZ세대, 청년층에서 나타나는 ‘조기 포기’, ‘영끌’, ‘조급증’ 또한 모두 이 구조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탈출구는 있는가 ― 비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척도’를 세우는 일


이 병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국, 타인의 기준이 아닌 스스로의 척도를 회복하는 것에 있다.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척도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 맞는 다층적인 기준을 세워야 한다. 반드시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단계가 존재하고, 그 안에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삶은 대개 어중간함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평균, 중간, 모호함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기쁨을 찾고, 성장을 지속하는 것이 인간적 삶의 본질에 가깝다.


또한 ‘과정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일도 중요하다. 글렌 굴드를 이기지 못하더라도,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간이 스스로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지 자문하는 것. 그 질문 없이는, 어떤 재능도 삶을 구원하지 못한다. 예술뿐 아니라 직장, 관계, 자기 계발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목적에만 몰두해, 과정 속에서의 의미와 즐거움을 잃고 만다. 탈출구는 과정 속 소소한 성취, 자신의 페이스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열린다.


느린 사람, 어중간한 사람, 실패하는 사람에게 열린 문


사회가 요구하는 ‘올’은 대개 소수만이 거머쥘 수 있다. 그러나 ‘낫씽’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당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자신만의 속도, 방식, 의미를 붙들며 어중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비교를 끊고, 타인의 시선을 내려놓고, 느려도 좋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그것이 이 병리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현대인은 다시 ‘미디엄(medium)’이라는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중간이 아니라 절충의 미학, 느림의 가치, 어설픔 속의 가능성을. 거기서 비로소 우리는 ‘몰락하는 자’가 아니라 ‘살아가는 자’가 될 수 있다.



결론

‘올 오어 낫씽’은 사회가 조장하는 착각일 뿐이다.

삶은 대개 중간 속에서 이뤄진다.

그 중간을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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