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인』에서 바라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세계
눈 내리는 한 수 ― 『명인』의 시작에 부쳐
바둑판은 말이 없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공간이며, 동시에 가장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세계다. 돌 하나가 바둑판에 얹히는 순간, 그것은 흑백을 넘어선 어떤 감정의 그림자가 된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그 조용한 울림 속에, 사람의 생이, 결의가, 때로는 절망이 스민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고요한 세계의 증인이었다. 그는 기자로서 마지막 바둑을 취재하며 ‘명인’의 침묵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단지 바둑기사의 일대기가 아니다. 『명인』은 퇴장의 미학이며, 한 인간이 아름답게 사라지는 방식에 관한 소설이다. 그것은 바둑이라는 정적인 예술을 빌려, 이별과 쇠락, 죽음을 쓰는 방식이었다.
한 수 한 수가 침묵으로 새겨질 때,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수 읽기가 아니라 삶의 궤적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그 돌 하나는 단순한 승부가 아니라, 존재의 무게를 담은 절창(絶唱)이다.
설국의 여인과 명인의 손끝 ― 교차하는 무정한 아름다움
『설국』을 떠올린다. 눈으로 둘러싸인 산장, 말없이 서로를 건너다보는 남녀, 시마무라와 유코. 그들 사이에 오가는 것은 대화보다도 더 많은 침묵이다. 말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말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저 마음에 가닿지 못한 채 흩어진다. 설국에서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긋난다.
『명인』 역시 그와 닮아 있다. 혼다와 시우(秀哉) 사이에는 긴장과 존경, 애증과 절망이 얽혀 있지만, 끝내 직접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승부는 감정이 개입될 수 없는 영역이다. 오직 예와 기술, 그리고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수 있다.
시마무라가 유코의 눈동자에서 ‘설국의 미’를 보듯이, 혼다는 시우의 손끝에서 ‘죽음의 예’를 느낀다. 말없이 퇴장하는 명인, 그것은 유코가 불에 타는 장면처럼, 비극적이되 정적이며, 감정의 파국을 오히려 극도의 침착으로 덮는다.
무정한 아름다움. 그것이 가와바타 문학의 핵심이다. 그는 언제나 감정을 누르고, 오히려 감정의 결핍을 통해 감동을 빚어낸다. 사랑의 부재, 교감의 실패, 퇴장의 예의. 이 모든 것은 그의 문장 안에서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덧없는 아름다움, 잃어버림의 미학
가와바타의 세계는 본디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완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잃어버림’ 자체가 아름다움의 조건이 된다. 『잠자는 미녀』에서 남자는 깨어나지 않는 소녀의 몸을 바라본다. 그녀는 반응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감정도 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무반응, 그 불가촉성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천사의 수면』에서도, 『이즈의 무희』에서도, 그는 늘 닿지 않는 감정을 그린다. 미완의 관계, 부재의 감각, 흐려지는 기억. 『명인』은 이 미학을 가장 정교하게 구현한다. 바둑이라는 형식미 속에서, 시우는 천천히 패배한다. 그러나 그 패배는 무너지거나 비참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흰 눈이 쌓이는 것처럼 조용하고, 눈부시게 사적인 것이다.
가와바타는 ‘예’로서 죽음을 그린다. 정제되고 절제된 패배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존엄이며, 아름다움이다. 그는 이탈하지 않는다. 소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바둑돌 하나를 두고 퇴장하는 그 장면을, 가장 장엄한 시로 기록한다.
“예”로 숨죽인 마음 ― 일본적 정서의 구현
그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 고유의 미의식을 떠올려야 한다.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 ―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연민. 유겐(幽玄) ― 드러나지 않은 것의 깊이. 사비(寂び) ― 쇠락 속의 정적. 이 모든 개념은 『명인』의 바둑판 위에 응집되어 있다.
명인의 마지막 한 수는 패배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예술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는 상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고 퇴장한다. 무례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극한의 존엄일 수도 있다. 예는 단지 형식이 아니라 감정을 숨기는 방식이자, 그 감정을 가장 깊이 전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설국』의 시마무라가 끝내 유코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명인도 마지막에 어떤 말도 남기지 않는다. 감정은 눌러 담긴 채, 바둑판 위에 고요히 응고된다. 그리고 바로 그 침묵 속에서 독자는 더 깊이 움직인다.
최후의 바둑돌과 흩날리는 눈송이 ― 가와바타 문학의 말 없는 끝맺음
눈은 말이 없다. 그것은 조용히 내리고, 조용히 사라진다. 『설국』의 마지막 장면에서 불빛을 향해 유코의 몸이 날아오르고, 동시에 하얀 눈이 쏟아진다. 그 장면은 충격적이되, 몽환적이고, 감각적이며,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명인』의 마지막 장면 역시 그러하다. 한 수, 마지막 한 수가 두어지고, 그것은 돌이 아니라 시(詩)처럼 바둑판에 얹힌다. 혼다는 기자로서 그 순간을 기록하지만, 동시에 시인으로서 그것을 애도한다.
명인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예’와 ‘아름다움’을 끝까지 지킨 삶의 방식이며, 가와바타가 평생 붙들었던 주제의 완성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아름다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조용히, 눈처럼 사라지는 인물들을 썼고, 끝내 자신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떠났다.
에필로그 ― 침묵의 문장들
가와바타의 문학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되지 않는 것, 그 여백이야말로 진짜 이야기다.
그의 문장은 마치 눈송이 같다. 녹기 전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녹고 나면 그 자리에 남는 건 한 줌의 감정뿐이다.
『명인』은 눈 내리는 바둑판이다. 그 위에 놓인 한 수의 돌은,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덧없음, 예와 퇴장을 한꺼번에 품고 있다. 그 돌을 바라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와바타의 독자에게 허락된 가장 깊은 응시다. 그리고 그 응시 끝에 우리 모두는, 어느 한 수의 조용한 아름다움 앞에 멈추어 서게 된다.
* 표제 사진은 『명인』의 주인공인 혼인보 슈사이(1874-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