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도록 ‘친절한 사람’이고 싶었다. 누군가 묻는 말에는 성심껏 답했고,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곤란한 부탁이 와도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 나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상대가 웃으면 나도 기뻤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좋은 사람’으로 남는다는 사실은 내가 이 세상에 제대로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피로가 차곡차곡 쌓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마다 허무가 발목을 잡았고, 저녁이 올수록 나는 조금씩 사라지는 듯했다. 어떤 이는 고마움 한마디 없이 내 호의를 당연하게 여겼고, 또 다른 이는 내가 기꺼이 열어둔 문을 무례하게 지나쳤다. 내가 ‘배려’라 믿었던 것들은 언제부턴가 상대에게 ‘당연한 것’이 되었고, 그렇게 나는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 “언제나 응답해야 하는 사람”, 끝내는 “만만한 사람”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친절’이 언제부터 ‘만만함’과 등치되었을까. 그 둘 사이의 간극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세상은 이를 쉽게 혼동한다. 조용히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더 크게 요구하고, 곤란한 부탁에도 웃으며 응하는 사람에게는 더 무거운 짐을 지운다. 나의 친절은 때로 내 몫의 권리와 휴식, 존엄까지 저당 잡히는 보증서처럼 취급되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내게 힘겹게 물었다. 나는 정말 ‘친절’했던 걸까. 거절이 두려워 억지로 웃음을 지은 건 아닐까. ‘친절’이라는 이름 아래, 나는 내 바운더리를 허물고, 상대의 불편을 덜어주려 감정을 눌렀으며, 결국 내 시간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그것이 진심일 리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따뜻함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었던 나의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정받고, 미움받지 않고, 불편을 주지 않는, 두루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망 속에서 나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친절은 타인을 향한 선한 의도, 간절한 마음이 맞다. 그러나 만만함은 매번 나를 잃는 길이다. 더는 나 자신을 하찮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내 바운더리를 분명히 하며 살기로 했다 .
진짜 친절은 누군가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단, 거기엔 ‘나를 지키는 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선이 없으면, 나는 언제든 타인의 기대에 맞춰 스스로를 억누르게 된다. 결국 남는 건 상처뿐이다. 한동안 이용당했다는 생각, 무시당했다는 감정, 기대와 현실 사이의 씁쓸함이 마음에 고였었다. 그렇게 친절은 상처로 변하고 말았다.
거절하지 못해서 마지못해 건네는 친절은 더 이상 친절이 아니다. 그것은 회피일 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먼저 내 감정과 시간, 상황을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 진심으로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선 안에서, 내가 괜찮다고 느끼는 범위 안에서만 친절하려는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어려울 것 같아요.” 처음엔 아주 어색했다. 마음이 불편해져선 무심코 상대방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전과 다른 마음으로 잠들었다.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은 하루. 불쑥 웃으며 타인의 감정을 먼저 챙기던 내가 사라진 하루. 나는 내 바운더리를 지켰고, 그래서 평온했다.
여전히 친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려는 세상을 앞에 두고 나는 내게 묻는다.
“지금 이 부탁, 받아도 괜찮을까?”
“이런 관계라면 내 마음을 다치지 않을까?”
“이번 친절로 내가 소진되지 않을까?”
질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그 짧지 않은 시간을 통해, 나는 내 마음이 견딜 수 있는 한계와 내가 지켜야 할 바운더리를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그 바탕 위에서 나는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나를 지켜내곤 했다. 모든 요청에 응답하지 않아도, 모든 관계에 다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때로는 무심해 보이더라도, 나를 먼저 돌보는 일이야말로 진짜 친절로 가는 길이다.
친절이 나를 하찮게 만들지 않도록, 누군가에게 ‘만만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오늘도 나는 조용히 선을 긋는다. 선을 긋는다는 건 벽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나를 지켜내는 일이기에 그렇다.
나는 여전히 친절을 택하겠지만, 만만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 친절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 반면 만만함은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낸 그림자일 뿐이다. 누구나 그런 것에 마음을 저당잡히고 싶진 않을 것이다.
내가 나의 친절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을 때, 타인의 요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허락한 만큼만 문을 열고, 감당할 만큼만 마음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곧 친절이다. 동시에 나를 지켜주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