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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새는 높이 날지 않는다

봄날의 지독한 허기

by 콩코드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어제(5월 5일) 오늘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일기예보로는 내일도 비소식이 있던데요. 예상하시는 것처럼 비가 그치면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게 되겠지요. 당장 폭염까지는 아니어도 지난 주와는 결이 다른 더위가 몰려올 거라는 예상에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한 여름밤의 꿈처럼 스쳐 지나가는 여린 잎의 연초록 빛깔을 더는 볼 수 없게 될 겁니다. 연초록이 사라진 자리에 짙은 녹음이 깔릴 터입니다. 연초록 빛에 넋 놓은 제겐 또 한 번의 아쉬운 이별을 가늠할 시간입니다.



산과 들에 연초록의 새순이 올라올 때쯤이면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동네 어귀가 자욱하게 변합니다. 막상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맞추려고 귀를 쫑긋 세워보지만 늘 그놈이 그놈 같습니다. 어느 땐 참새에도 여러 종류가 있나 싶다가도 필경은 새파란 봄기운에 종달새도 가세한 모양이라고 내심 알은 체를 합니다. 전 종달새가 언제 소리를 내는지 알지 못합니다. 익숙한 새들의 노랫소리에 전례 없는 목소리가 섞여 귓가에 내려앉는 게 무척 달가워서입니다. 뜻밖의 만남은 거듭 반갑고 자주 즐겁습니다. 한참 머물러 재잘재잘, 지지배배, 꾀꼴꾀꼴 등속의 소리를 듣습니다. 가만한 웃음이 퍼집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연이 빚어내는 합창의 여운이 깊어갈 때면 꼭 바람을 가르는 일군의 무리가 등장합니다. 자주 목격되는 장면입니다. 마치 구역의 법칙처럼 통용되는 저릿한 광경을 보고 넋 놓지 않을 재간은 사실 없습니다. 인트로 같은 느낌이랄까요 졸개들이 나와 장내를 정리하면 그제야 나팔수와 무용수를 앞세우고 주인공이 나타난다는 점만 다릅니다. 인트로와 정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형식상 아웃트로가 적확한 표현이겠습니다만 인트로만큼 입술에 짝 달라붙지는 않습니다.



최상위 포식자의 위엄을 본 적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느꼈다고 해야겠지요. 위엄은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포식자는 뜬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대머리 독수리처럼 매섭거나 흑곰처럼 크지 않으면 말이죠. 그놈이 날 때면 사위에 정적이 어지간히 감도는 통에 누구라도 어렵잖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아, 하고 탄성이 울리면 대지 위로 메마른 먼지가 피어오르고 멀리 개가 짖습니다. 놈은 그 시기를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습니다. 종국엔 약간의 뜸을 들인 뒤에 전매특허인 유니크한 소리를 앞세워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는데 그쯤이면 이미 녀석이 지표면 가까이 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누구도 다른 어떤 녀석이 그 같은 소리를 낼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습니다.



제 몸의 네댓 배는 족히 될 날개를 잔뜩 펴고 놈들이 비행하면 쨍하고 칼날이 맞부딪는 소리가 가까이 들립니다. 가파르게 솟는 금속성의 소리엔 날이 서고 지배자의 등장을 알리는 저 팡파르에 혼비백산한 산짐승들은 땅에 낯을 묻기 바쁩니다. 더러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싶게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어스름이 내리기 직전 들판에 떼를 지어 나타나는 저공비행의 달인들, 까마귀입니다. 까마귀 떼의 장엄함은 등장과 동시에 사위를 가르는 뜨거운 고요와 지표면에 낮게 깔리는 차디 찬 사자후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어스름이 깔릴 무렵'은 감정이 특별히 고조되는 시기이자 지점입니다. 그런 구도에선 여하튼 8할은 접고 들어가죠. 뭘 해도 되는 분위기. 등장씬으로 오랜 세월 작동된 천연의 무대장치입니다. 연극 무대에서도 그런 정치는 등장인물의 고뇌와 결기를 표현하는 데 이주 탁월하게 기능합니다. 자연계도 미세조정을 하는지 요즘은 대중의 시각이 한 곳으로 모이는 그런 장치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합니다. 예전과 달리 주인공의 아우라를 뒷받침하는 신비주의가 먹히지 않은 것과 무관치 않겠지요. 소셜 매체가 발달한 뒤로 거의 실시간으로 유명인의 동정이 노출되면서 미지의 영역, 신비감을 자아내는 영역이 그만큼 길을 잃은 때문입니다. 까마귀 떼가 물러난 뒤에야 스멀스멀 기어 나오던 뭇새들이 툭하면 까마귀 주위에 모여 재잘거리고 물정 모르지 않을 비둘기들은 또 무슨 바람이 났는지 종종걸음으로 까마귀 떼에 다가섭니다. 그러다 큰일 날 텐데..... 제 말이 들릴 리 없습니다.





거듭 이어 쓰게 돼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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