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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와 비위 맞추기의 환장할 코미디

개인적으로 엮이지 말고, 사회적으로 배제해야

by 콩코드


특별하게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특별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새삼 특별하다. 그들이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다른 스텝을 밟는 것까지는 제법 봐줄 용의가 있다. 주변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사회생활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들을 싸잡아 멍청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싸잡아'라는 부정의 부사를 쓴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런 유령의 사람들을 겪어본 분이라면 이해가 가실 텐데 한 겹이 아니라 몇 겁이라도 싸고 또 싸서 멀리 내던져버리고 싶다. 그것 말고는 정말 대책이 없는 인간형들이다.



심리학자 에런 제임스는 《멍청한 놈들》에서 멍청이는 '자기중심적이라 자신의 시간을 대단히 크게 부풀려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했다. 예를 들어 멍청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줄 서라는 말을 들으면 무시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지적한 사람에게 꺼지라는 소리를 스스럼없이 뱉는다. 이 대목에서 며칠 전 지하철역 구내 상황을 떠올릴 분들이 분명 있으실 게다. 대형마트의 계산대 앞에서 벌어진 일을 상상하는 분도 계시겠다. 주변 사람들이 연신 눈치를 주는데도 이들 멍청이는 낯빛 하나 바꿀 의향이 없다.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하다. 울화통이 치미는 건 주변 사람들이다.



제임스는 그들의 행동을 이렇게 분석했다. "멍청이들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평생 그런 바탕 위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과연 그들도 바뀔 수 있을까?



(멍청한 짓은) 사회적인 행동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남을 제대로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하게 됩니다. 멍청한 인간은 현실과 관계없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멍청이의 비위를 맞춰주는 주변 친구들도 있고요. 따라서 멍청한 짓은 사회적인 행동이기도 하지만 고치기 힘든 개인적 성향이기도 합니다. - 에런 제임스(이하 인용문 저자)




멍청이는 타인이 말과 행동을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고 믿는다. 설마,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전에 과거 접 그들과 맞닥뜨린 경우를 떠올려보라. 멀리 갈 것 없다. 앞서 예로 든 지하철, 마트 외에도 그들의 주 출몰 지역은 많다. 대뜸 걸려온 전화통 너머로 들리는 쌍스러운 목소리. 예절이라고는 애초에 쌈 싸 먹은 목소리에 난감한 경험이 있다면 틀림없다. 바로 그 상대가 여기서 말하는 멍청이다. 가관은 그런 멍청이를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것. 그들은, 나는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선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멍청이를 위해 자기 간과 쓸개는 물론 뭐든 내줄 태세다. 내게 더 없다면 남의 거라도 가져다 바칠 인간들이다. 이 대목에서 멍청이의 기고만장이 어떻게 하늘을 찌르지 않을 수 있을까.



자청해서 멍청이에게 비장까지 내준 아첨꾼들이 멍청이의 지독살스러운 편향을 조장하고 나아가 강화한다. 곁에 달라붙어 멍청이가 먹다 남긴 상의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는 꾼들을 보고 구역질이 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세상 달통한 눈매와 음흉한 속내가 빚어내는 환장할 장면을 마주하면 누구라도 구역질 나지 않을 재간이라곤 없을 게다. 내 장담한다.



그런 인간 유형을 곁에 두고 있다. 그 덕에 매일 매 순간이 코미디다. 그놈 머리 뚜껑을 열고 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난 대단히 호기심 많은 사람이 되었다. 덕분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놈들의 '환장할' 콤비 플레이를 보며 혀를 차곤 하는 나는 그 덕에 입 주변에 팔자 주름 생길 틈이 없다. 멍청이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그놈이 주워 먹는 모습을 지긋히 내려다보는 멍청이의 시선만 아니라면 역겨움이 사뭇 약해지겠지만 그런 기대란 맞는 법이 없다. 내일도 또 그다음 내일도 놈들이 빚어낼 정박자가 계속될 전망이다. 웃음기 가시고 이 상황을 보자. 벌건 대낮에 얼마나 모욕적인가.



- 혹시 마음속으로 명청한 인간들을 질투하고
있는 걸까요?
-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멍청한 인간이 눈앞에 있으면 그저 허탈하고 당혹스러워 화가 날 뿐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지?'라는 생각으로 우울해지는 것이지 명청한 인간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멍청한 인간이 성공한다면 질투심을 느낄지도 모르지요. '저런 멍청한 인간이 유명해지다니.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나도 저렇게 명청하게 행동했어야 했나! 어쩌면 저 멍청함이 삶의 지혜일지도 몰라.'




한동안 사회 내에 '지체된 정의'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던 적이 있었다. 신속히 집행되지 않는 정의와 그 틈바구니에서 범죄자가 활개 치는 현실은 분명 예견된 갈등과 미증유의 충돌을 상시화 한다. 지난 몇 년 정의에 관한 기존 관념에 균열을 내는 상황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대중의 의구심은 깊어 갔다. 과연 정의가 살아있기는 한 건가,라는 실체 없는 의문이 한동안 떠돌았다. 얼마 후 같은 의구심을 입밖에 내는 사람이 현격히 줄었다.



반대로 얼토당토않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늘었다. 전에는 도덕률에 때라 결정을 미루거나 결정 자체를 뒤엎는 경우가 많았다면 지금은 그깟 도덕률쯤 간단히 무시한다. 정의가 당도하지 않은 땅에서 벌어지는 천형과도 같은 것이리라. 그들에게선 우리가 결심하면 못 할 것 없다는 아우성만 가득하다. 그 말이 지닌 폭력성에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결심이 온당한 것이냐는 판단은 아예 없다. 우리가 속한 진영에 이득이 되면 부당조차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못할 것 없는 것'의 영역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전복하려는 살기가 번득인다. 한마디로 멍청이들이 일제히 세상을 경영하려고 나선 것이다. 전례 없는 경우다. 에런 제임스는 멍청이가 자기중심적이라고 단언했다. 비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아예 귀를 틀어막았다. 그들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 앉아 호령하려 하고 있다.



멍청이들이 무슨 짓을 하든 누구 하나 나서서 그들을 경책 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정말 세상이 제대로 뒤집혔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더욱이 현자들을 제치고 멍청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나서서 룰을 바꾸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판에선 까딱하다가는 주홍글씨 찍히기 십상이다. 실제 그런 분위기 아닌가. 이런 세상이라면 누군들 괜히 나서서 손해 볼 것 없다, 는 피해의식만 내면화하지 않겠는가. 괜한 일에 호기 부리지 말고 나만 챙기자,라는 의식이 뒤를 잇는 건 시간문제이라 생각한다. 이쯤 되면 공동체의 이상은 개에게 던진 것과 같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웠다면 그래도 뭔가라도 했다는 강변이라도 할 수 있겠다. 벽 틈으로 줄지어 기어 다니는 개미떼가 기둥을 온통 갉아먹어 기초 자체가 주저앉은 지금의 모양새라면 사정이 다르다. 에둘러 말할 것 없다. 최악이다. 누구도 나서지 않는 세상에 부도덕, 불의, 각종 범죄, 가짜 뉴스, 고소/고발이 난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껍데기들을 방치하면 결국 그들이 절대다수가 될 터다. 우리가 꿈꾼 세상이 이런 거였을까.



멍청한 인간도 달라질 수 있긴 하지만, 가능한 한 멍청한 인간과는 엮이지 않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멍청한 인간이어도 돈을 벌어다 주거나 학문적인 명예를 가져다주면 회사나 기관은 그를 그대로 두기도 합니다. 로버트 서튼 Robert Sutton은 <또라이 제로 조직(N0 Asshole Rule)>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지만 이것이 언제나 이룰 수 있는 목표는 아닙니다. 멍청한 인간들과 맞서려면 명청한 인간들을 배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힘을 합해 대항해야 멍청한 인간들이 몰락합니다. 정치권보다는 소규모 집단에서 더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지요. 멍청한 인간은 제대로 된 사람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이어도 사회가 나서서 멍청한 인간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다. 멍청이들은 자기 중심성에 영혼을 판 자들이다. 형편없는 자신을 어느 누구보다 최고라고 믿는 정신병자들이다. 에런 제임스는 그런 자들에게 뭘 기대하느냐고 되묻는다. 거리를 두라. 에런 제임스의 처방은 간단하다. 괜스레 그들도 달라질 수 있다는 헛된 기대는 품지 말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그는 멍청이들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대단히 크다는 점에서 그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대로 된 사람들이 가는 길을 훼방하는 사람에게 관용은 없다.



관용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선행이다. 너무 오랫동안 우린 약자가 강자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강제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살았다. 이런 식의 전도, 입장 뒤바꾸기는 해악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의 책임 소재를 흐리게 만든다. 분석과 판단을 그르친다. 누군 이 말에 혐오라는 프레임을 씌울지 모르겠다. 자기 밥그릇 이상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게 혐오라면 난 기꺼이 제대로 된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시로 덮는 망할 멍청이들을 아낌없이 혐오하겠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사회적으로 까발리고 배제하기 위한 공론장을 기꺼이 만들어나가겠다.



청산은 단 한 번의 기회 위에 올라탄다. 시기를 놓칠 때마다 그들은 자신을 피해자라고 우긴다. 급기야는 도통 알 수 없는 자들을 피해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뻔뻔한 전례지만 그때마다 통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공세를 늦추면 이번에도 그들은 같은 수단을 동원할 공산이 크다. 오해라면 아니라고 말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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