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책과 사람 14화

마키아벨리 오명 해부: '악의 교사'라는 누명을 벗기다

by 안녕 콩코드
​《군주론》의 현실주의와 《여우가 되어라》의 아이러니를 통해 본 자유를 열망한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에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와 500년의 오해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는 서양 정치철학의 전환점을 마련한 기념비적인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악의 교사', '권모술수의 대가'라는 부정적인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하고 기만적인 통치 행위를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살인적인 마키아벨리"라 비난했고, 종교개혁가들 역시 마키아벨리를 사탄의 현신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은 그의 대표작인 《군주론(Il Principe)》의 일부 구절만을 맥락에서 분리하여 편협하게 해석하고,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작인 《로마사 논고(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가 담고 있는 공화주의적 이상을 철저히 외면한 결과입니다.


​본 글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정치철학 전문가 에리카 베너(Erica Benner)의 저서 《여우가 되어라(Be Like the Fox)》에서 제시된 혁신적인 해석을 중심으로, 마키아벨리에게 씌워진 오명의 실체를 해부하고, 그가 궁극적으로 국가의 안정과 시민의 자유를 열망했던 냉철한 현실주의적 애국자였음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오명의 근원: 《군주론》의 현실주의와 왜곡된 해석

​마키아벨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전적으로 1513년에 탈고된 《군주론》에 기인합니다. 이 책에 담긴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조언들은 당대와 후대의 도덕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곧바로 비난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오해의 실체: 공공의 목적 vs. 사적인 이익

​흔히 마키아벨리 사상의 핵심으로 간주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문구는 사실 《군주론》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문구는 17세기 철학자들에 의해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키아벨리의 실제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주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는 진실, 자비, 인간애, 종교에 반하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


​[왜곡과 본질]

​왜곡: 이 문구는 권력자가 사적인 욕망이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어떤 비윤리적 행위를 해도 괜찮다는 면죄부로 해석되었습니다. 현대의 '마키아벨리즘'은 종종 이러한 개인의 이익 추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됩니다.

​본질: 마키아벨리가 말한 '목적'은 군주의 사적인 욕망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과 내부 분열로 위기에 처한 국가와 공동체의 생존과 보존이라는 최고의 공공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의 가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는 일상적인 개인 도덕률과는 다른 차원의 정치적 윤리가 불가피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음을 냉철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그는 '있어야 할 삶(이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삶(현실)'을 다루는 최초의 정치학자였습니다.


​'악의 교사'가 아닌 '정치 현실의 의사': 냉정한 계산과 생존의 논리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조언합니다. 이 역시 군주 개인의 잔혹성을 부추긴 것이 아닙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위험에 처하면 은혜를 모르는 존재'로 파악했습니다. 그는 군주가 인간에 대한 이러한 냉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두려움의 효용성: 사랑은 변덕스럽고 쉽게 사라지지만,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군주의 통치 아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더 확실하고 안정적인 수단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감정적인 판단이 아닌, 국가 보존을 위한 계산된 정치적 기술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유능한 외과 의사"에 비유되곤 합니다. 국가라는 환자의 생존을 위해 때로는 환자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냉혹하게 환부를 도려내는 결단이 필요함을 역설했을 뿐입니다. 그는 기존의 종교적/도덕적 이상주의와 정치라는 특수한 영역을 분리하여 현실적인 판단의 영역으로 가져온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였으며, 결코 도덕 그 자체를 파괴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에리카 베너의 재해석: 아이러니를 통한 도덕의 옹호

​옥스퍼드 대학교의 정치철학 전문가 에리카 베너는 《여우가 되어라》를 통해 마키아벨리가 500년 동안 뒤집어쓴 오명을 혁신적인 관점으로 벗겨냅니다. 그녀의 해석은 《군주론》을 액면 그대로 읽지 않고, 마키아벨리가 사용한 아이러니, 풍자, 암시를 해독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군주론》은 폭군들에게 보내는 아이러니한 경고장

​베너는 《군주론》을 단순히 군주들을 위한 권모술수 지침서가 아니라, 당시의 폭군들(특히 메디치 가문)에게 보내는 아이러니와 풍자가 가득한 텍스트로 해석합니다.

​악덕의 역설: 마키아벨리가 '악덕'을 권유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실제로는 그 행위들이 장기적으로 볼 때 군주 자신과 국가에 얼마나 해가 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폭군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만적이고 잔혹한 통치 방식이 결코 안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며, 결국 군주를 파멸로 이끌게 됨을 은밀하게 경고한 것입니다.

​공공선(公共善)의 강조: 베너는 마키아벨리즘의 진정한 핵심이 권력 유지 기술이 아니라, 권력을 통해 달성해야 할 공동체의 목표(공공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마키아벨리는 "왜 사람들은 공허한 미사여구와 번지르르한 외모에 잘 속아 넘어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진정한 통치자는 겉치레가 아닌 실질적인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여우'와 '사자'의 참된 의미: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역량(Virtù)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요구한 '여우의 간교함'과 '사자의 용맹함'은 단순한 기만술이나 폭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너는 이 조언을 마키아벨리 사상의 핵심 개념인 비르투(Virtù)와 포르투나(Fortuna)의 관계 속에서 해석합니다.

* 포르투나(Fortuna)
의미: 운명, 행운, 예측 불가능한 흐름
베너의 해석: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과 상황, 때로는 '운명의 여신'으로 비유됨.

* 비르투(Virtù)
의미: 능력, 역량, 용기, 결단력, 지혜
베너의 해석: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그 흐름을 파악하여 기회를 포착하고 통제하려는 인간의 적극적인 역량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요구한 '여우의 간교함'은 곧 포르투나의 흐름을 읽고 기회를 인식하며 위험을 피하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사자의 용맹함'은 운명의 거친 흐름에 맞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즉,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역량을 발휘하여 더 나은 삶과 국가를 건설하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숨겨진 진심: 공화주의자로서의 정체성과 비상 처방의 《군주론》

​마키아벨리가 '악의 교사'가 아닌 '자유의 옹호자'였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작이자 평생에 걸쳐 집필한 **《로마사 논고》**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사 논고》: 자유와 법치에 기반한 공화정의 이상

​공화주의의 대변자: 《로마사 논고》에서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역사를 연구하며 법치에 기반한 공화정이 가장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정치 체제임을 역설합니다. 그는 시민의 자유와 참여를 핵심 가치로 보았으며,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국방에 참여하는 강력하고 자유로운 공화국을 꿈꾸었습니다.

​국가의 힘은 시민에게: 그는 군사력의 핵심은 용병이 아닌 자국민으로 이루어진 시민군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바탕으로만 진정한 힘이 나온다는 공화주의적 신념을 반영합니다.


​《군주론》은 비상 상황의 처방: 일시적인 과도기적 역할

​《군주론》이 집필된 16세기 초 이탈리아는 프랑스, 스페인 등 외세의 침략과 피렌체의 내부 분열로 극도의 혼란과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처방: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비상 상황에서는 분열된 이탈리아를 구원하고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일시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리더십(군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과도기적 수호자: 《군주론》에 묘사된 잔혹하고 냉정한 군주의 모습은 국가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목표 앞에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과도기적 수호자의 역할이었습니다. 그의 최종적인 이상은 군주정이 아닌, 그 군주정이 안정시킨 토대 위에 세워질 자유로운 공화정이었던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마키아벨리를 '자유의 옹호자'로 평가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됩니다.


​진짜 마키아벨리의 재평가와 현대적 시사점

​마키아벨리에게 씌워진 '악의 교사'라는 오명은, 그의 사상 중 가장 자극적인 부분이 정치적 맥락에서 분리되어 후대의 권력가들에 의해 개인의 이익을 위한 권모술수로 오용된 비극적 결과입니다.


​마키아벨리는 도덕을 배척한 악인이 아니라,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누구보다 냉철하게 인식했던 현실주의적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위기에 처한 조국 피렌체를 사랑했으며, 국가의 생존과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군주에게 '어떻게 악을 행해야 하는가'까지 가르쳐야만 했던 비극적인 애국자였습니다.


​에리카 베너를 비롯한 현대의 마키아벨리 연구가들이 밝혀냈듯이, 그의 오명이 벗겨질 때 비로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마키아벨리의 참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개인적인 영달이 아닌, 오직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용기와 지혜(Virtù)를 갖추고 예측 불가능한 운명(Fortuna)에 맞서라."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의 가르침은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와, 공동체의 목표를 위한 책임 있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의 이름이 더 이상 기회주의적인 권모술수의 변명이 아닌, 자유와 공공선을 향한 냉철한 현실주의의 상징으로 기억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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