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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유연

2주 동안 승인 없이 무단 퇴근할 정도로 기강 무너져.

by 콩코드


"그날 다시 1주일치 유연근무를 신청했다."



지난 10월의 어느 날 기록이 눈에 띄었다. 보통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기록을 남긴다.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 말이다. 근 1년이 다 되어간다. 그날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 편에서 기억해야 할 각별히 즐겁거나 슬픈, 그러니까 다분히 개인전속적인 사정이 아니라는 점은 아쉬웠다. 단지 누군가의 행위가 대단히 교묘해서 섣불리 잊혀선 안 되겠다 싶다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사안이 중대하다는 판단이 기저에 흐른다는 반증일 테니. 그날의 기록은 나나 그에게 시뻘건 모욕이었고 서늘한 각축장이었다. 어느 한쪽이 사라져야 끝날 전쟁. 그가 불러낸 전쟁의 서장이었다. 그 일이 모종의 트리거가 될 수도 있었다. 사안이 공교로웠다.



그날, 지난 10월의 그날이 도래하기 전 2주 동안 하찮은 과장은 전과 달리 국장에게 유연 근무를 신청하지 않았다. 하 과장은 전과 다름없이 5시에 퇴근했다. 과장이 1시간 일찍 퇴근하는 식으로 유연근무를 하려면 가장 먼저 점잖은 국장에게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하 과장이 점 국장에게 올릴 신청서에는 1시간 먼저 퇴근하는 대가로 1시간 일찍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승인 없는 퇴근은 두 말할 것 없이 무단 퇴근에 해당한다. 비록 과장이 1시간 일찍 나왔다고 하더라도 사실에 변함이 없다.



사정을 알리 없는 점 국장은 과장이 줄곧 몇 달째 매일 1시간씩 일찍 퇴근하는 유연근무를 하며 부서 사정은 나 몰라라 하더니 이제야 정신 차렸나 싶었다. 기특하게도 하 과장이 지난 2주 동안은 유연근무를 신청하지 않았다. 점 국장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점 국장의 기대와 달리-그런 기대를 했을지 의문이지만-공무원들이 신줏단지 모시듯 챙기고 또 챙기는 신청과 승인에 관한 절차를 과장이 간단히 건너뛴 사건이지만 점 국장은 내막을 알려하지 않았다. 국장은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속 끓일 일 없잖아. 하 과장 신경 건드려서 좋을 리 없고.


1) 앞서 누군가가 여러 달을 유연근무로 신청하더니 2주 동안은 어쩐 일인지 신청 없이 무단 퇴근. 직후 다시 그가 유연근무 신청을 한다면 그를 지켜본 사람은 어떤 느낌이 들까? 1주일, 그 10일 이면 깜빡 잊었을 리 없는 시간. 과장이 돼서 허구한 날 1시간 먼저 사무실을 나서는 게 그로서도 찜찜하지 않았을까? 직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싶기도 하고 상사가 어떤 평가를 내릴까 싶기도 했겠지.


무단 퇴근을 감행하고 2주가 지나자 하 과장은 평소와 같이 점 국장에게 1주일 유연근무를 신청했다. 점 국장이 이에 관해 경위를 물은 정황이나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국장 휘하에 과장들이 워낙 많아서 일일이 신경 쓸 수 없었을까? 과장이 수 십 명이라면 혹 그럴 수도 있겠다. 과장은 9명이었다. 국장은 고작 9명의 근태상황조차 파악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결재했을 것이다. 매일 하 과장이 특정시간에 자리를 비우든, 과장이 상관의 승인 없이 무단 퇴근하든 상관하지 않았을 터다. 아무리 관심이 없더라도 점 국장은 몇 달째 유연근무를 올리던 과장이 일순 잠잠해진 것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관찰하거나 묻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굴었다. 특히 2주간의 휴식기를 거쳐 다시 하 과장이 유연근무 신청을 했다면 혹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고 묻는다고 책잡힐 일은 없었다. 서로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라도 맺은 듯했다.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 과장이 속칭 개차반이어서? 지가 알아서 할 테지 싶은 심정으로 방치?



재고가 필요한 행위를 방관하면 행위는 기어코 반복된다. 한 번 하고 그칠 건더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징후가 안 좋은 행위일수록 예후가 좋지 못하다. 어디로 튈지 모를 만큼 의도와 진로가 교묘해지는 것이다. 자신이 입을 꾹 닫거나, 혹 알려지더라도 몇 사람이 쉬쉬하고 입을 맞추면 누구도 모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규정 따위 무시하는 일도 아니다.



점 국장은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희희낙락했다. 잔뜩 어깨에 힘을 넣고 과장 밑에 있는 한심한 팀장과 잘 가는 두부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과장의 행위가 뒤틀렸다고 해도 국장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지 않았으니 그럴 만했다. 과장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줄은 꿈도 꾸지 않은 듯했다. 지위에 걸맞은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이 바닥에선 이렇게 저렇게 무시당하는 법이다. 흔히 신상관리를 잘하는 말에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근태다. 출퇴근 시간 엄수, 무단 이석 금지가 주 레퍼토리다.



제반 사정상 의심 살 만한 구석이 없지 않은데 대충 눈 감고 넘어가주는 분위기, 9개 과를 관장하는 국장이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하 과장은 점 국장의 평소 태도를 유심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책임의식이 없는 관리자나 통솔능력 없는 책임자의 전황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문제가 불거져야 몸이 달아서 덤벼드는 양상도 비슷하다. 그래서 무산안일이 뼛속까지 박혔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국장이 과장을 통솔하지 못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국장이나 과장이 한통속인데- 누가 나서서 잘못을 지적하고 비위를 고발한단 말인가. 한심하기가 끝이 없다.



국장은 과장이 매일 빠짐없이 1시간 일찍 퇴근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과장이 허구한 날 일찍 퇴근해서야 사무실 질서가 서겠느냐는 일반적인 질책에서부터 과장이 자리를 빈 시간에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대처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정도의 일말의 걱정이라도 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 하다못해 과장이 유연근무의 취지를 방기하고 붙박이도 일찍 퇴근하는 것에 직원들의 뒷말이 없겠느냐는 그 흔한 주의조차 점 국장은 하지 않았다.


2) 물론 직원 알기를 발가락 때만큼도 알지 않는 과장은 겉으로라도 직원을 대단히 위하는 둣 행세했다. 실상은 민원이 생기면 나 몰라라 하는 게 기본이고 혹 민원이 장시간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직원 탓을 하는 게 딱 그의 수준임에도 겉으론 한없이 호방한 척했다. 문서 결재를 하고 한 참 뒤에 왜 내용을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직원에게 호통치는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한가? 과장에게는 그게 일상이었다. 결재는 똥구멍으로 했나 하는 말이 욕지기가 목구멍 뒤에서 어른거렸다. 후자가 급관심사였을(직원은 안중에 없이 국장에게 책잡히지 않을까 싶은 데나 관심을 쏟는) 그로선 그날에 그가ㅜ어떤 심경에 사로잡혔는지 세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 적어도 선뜻 신청서를 올리지 못할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그를 익히 아는 사람이라면 못내 우스운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치 보스라도 되는 듯 가오라는 가오는 다 잡고 다닌 그가 아닌가. 국장 정도는 가볍게 넘기던 그이기도 했다. 국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동행한 팀장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장 보라는 듯 제 서류를 탁자에 던져 놓는 위인이었다. 요란한 소리에 국장은 움찔하면서도 과장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다. 과장은 한 번도 구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민망은 동석한 팀장들의 몫이었다. 하루도 아닌 1주일을, 거기에 1주일을 더 보태 총 2주 동안 국장에게 유연근무신청서를 올릴 수 없을 만큼 그 천하의 과장이 궁색해졌단 말인가? 일찍 퇴근은 하고 싶었던 과장은 아무도 모르게 규정에 어긋나는 짓에 착수했다. 상식 밖의 일이었지만 그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했다면 과장이 저토록 상사 앞에서 본연의 책무를 방기한 것은 물론 규정을 무시하고 무단 퇴근하는 일까지 태연하게 벌였을 리 없을 것이다. 적어도 국장이 가벼운 정도라도 난색을 표했다면 과장이 그 후 봐가며 유연근무를 올렸을 것이다. 씩씩거리면서도 결국은 제시간에 퇴근하지 일이 많았을 터다. 누누이 하 과장은 직원에게 어디 갈 때는 알아서 말하고(직원이 올린 출장신청서에 결재하고도 과장은 자리에 와서 신고하라는 말을 했다. 저런다. 정작 본인은 국장에게 결재조차 올리지 않고 무단퇴근하면서 말이다.), 눈치껏 일하라는 교지를 내렸었다. 하다못해 하 과장은 자신이 앞장서서 유연근무의 취지-출태근편의, 개인학습 등에 활용-를 뭉개뜨리고, 유연근무를 마치 붙박이로 이용하는 것에 직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돌아보는 정도의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국장의 암묵적인 승인을 등에 업고 하 과장은 1주일 단위로 국장에게 유연근무를 신청했다. 국장은 과장이 올리는 대로 따박따박 결재했다. 향후 일이 어떻게 발화할지 모른 채. 그 후 과정과 실태를 보면 국장은 확실히 애초부터 하 과장이 작정하고 매일 1시간 일찍 퇴근하는 것에 이렇다 할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터다. 그러고도 국장이나 과장이 직원들을 제대로 통솔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국장은 과장의 상식 밖의 행각에 거의 방목 수준으로 과장을 다룬 정황이 눈에 띈다. 하다못해 공식석상에서 하 과장이 엉터리로 보고하는데도 한마디 말없이 지나쳤다. 그 우산 아래서 하 과장은 똥폼만 잡고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누릴 권리는 꼬박 챙겨 먹는 기생충으로 변했다. 놓고 하 과장의 행덕을 까발린 이유는? 작정한 것이다.


3) 상사에게 유연근무 신청서를 올린 것처럼 허위로 상황을 꾸민들 사무실 직원들이 어떻게 안 단 말인가? 설혹 안다고 해도 내게 맞설 직원들이 어디 있야 말이다. 과도한 자신감이 결국 자신의 심장을 찌를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과장은 지껄였다. 아무리 남다르기로서니 몇 달째 직원들만 남겨두고 매일 1시간씩 일찍 퇴근하는 부서장을 어떤 상사가 잘 했다고 토닥일 수 있을까? 수요일이면 과장의 전철을 따라 팀장들도 모두 퇴근하는 마당이니 사무실 행색이 가관이었다. 어떻게 하나같이 자신들 생각만 하고 사무실과 직원 생각은 안 하는지..... 이 모두가 가장 기본적인 처신조차 망각한 과장 덕이란 건 삼척동자도 알 일이었다. 그러고도 과장 입네 행세하는 꼴이라니 백번 역지사지해도 역겹다. 이게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 머릿속에서 시민행복, 시민안전은 구두선에 그칠 뿐이다. 빛 좋은 개살구다. 말만 그럴듯하지 속 빈 강정의 영혼 없는 공무원이 양산되는 데는 그런 부서장들의 처신이 몫했다. 쭉정이를 솎아내지 못하는 책임자 또한 무능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세간의 평가를 불식시키려면 당장 나서서 엄단해야 할 것이다. 책임자에게는 직접적인 잘못이 없는데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건 억울하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과장이 주도한 본 사건은 양태 자체가 매우 치졸하다. 유연근무 승인을 받은 것처럼 꾸몄다. 그리곤 누구보다 앞서 사무실을 나섰다. 아주 태연히. 죄질로 치면 예가 없다. 여기서 더 덧붙일 말이 뭐가 있겠나.


자신의 상식 이하 행각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가 남에게 한 방식대로 모멸감을 줘서라도 깨닫게 하는 게 좋다. 희한한 구석이지만 평생 남에게 모멸감을 주고 산 그런 치들이 자신이 당하는 모멸감에는 극도로 치를 떤다는 것이다. 모욕은 안하무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처방이다. 10 여일 출장을 가면서 진중한 팀장은 부러 인사하러 하 과장 자리로 가지 않았다. 하 과장은 전날 진 팀장이 얼린 출장서류에 결재했다. 진 팀장이 출장에서 돌아온 날 하 과장은 잔뜩 화난 표정으로 물었다. 오랜 시간 출장 가면서 왜 인사하지 않았느냐. 어이가 없었다. 결재를 하지 않았느냐고 맞받아쳤다. 결재할 때는 뭐 했느냐는 뜻이다.



하 과장은 1시간 일찍 퇴근하는 유연근무 조건으로 1시간 일찍 출근한 그 시간을 팀장이며 직원 가리지 않고 불러 모아 커피 마시며 노닥거리는 데 썼다. 공개리에 내가 1시간 일찍 퇴근할 테니까 팀장들도 일찍 퇴근하라고 떠벌린 위인이다. 과장과 팀장들이 다 떠난 사무실에 직원들만 덩그러니 남는다고 생각해 보라. 사무실 사정은 안중에 없는 과장이라니 끔찍하다. 부서 책임자라면 매일 1시간씩 일찍 퇴근하는 것에 문제의식이 없을 수 없다. 더욱이 팀장들도 자기를 따라 일찍 퇴근하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인사라면 볼짱 다 본 것이다. 그렇잖아도 가는 곳마다 설화를 일으키고 똥만 싸지르고 치우지 않은 위인이다. 밀리고 밀려서 별 대접 못 받는 부서에 온 날 하 과장은 입 싼 티를 여지없이 냈다. 싫은 사람은 언제나 싫더라. 내게 찍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엄포였다. 인격을 함축적으로 드러낸 말이었지만 하 과장은 모르는 눈치였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하 과장의 말에 답했더니, 팀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하 과장이 질책했다. 그런 부장이 그 정도밖에 안 되게 2주 동안 국장에게 결재조차 널리지 않고 무단으로 퇴근했다. 하 과장은 매주 1회씩 점 국장에서 결재를 올렸다. 2주간 자신이 결재를 올리지 않은 사실을 몰랐을까? 지난 몇 개월 동안 하 과장은 빠짐없이 1주일치 유연결재를 올렸었다. 마치 기계적이라 할 만큼 정확하게. 하 과장은 그 2주간 아침에 1시간 일찍 출근해 자신이 유연결재를 받은 걸 직원들이 믿도록 위장했다. 자신과 서무담당 외에는 타인의 유연근무 사항을 알지 못하는 점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주임 팀장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 늘 아침에 1시간 일찍 오고 1시간 일찍 퇴근했으니까 어련히 결재를 받고 가지 않았겠느냐고 그가 말했다. 정말 새까맣게 잊었다면 자격이 없는 행위다. 알고도 그랬다면 참으로 뻔뻔한 짓이라는 비난을 면치 어렵다. 규정을 지켜야 마땅한 사람이 돈괴 시간을 도적질 하고도 자랑스럽게 얼굴을 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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