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면 이내 자연석으로 둘러싼 벽 위로 갖은 색의 수풀이 넘실거린다. 보라색, 흰색, 노랑, 빨강, 연둣빛 등등. 작정하고 봤다면 그보다 많은 색을 눈에 담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건물에 바른 색까지 더하면 색에 눈이 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수를 세거나 어떤 색깔이라고 특정할 길 없는 색들이 출근길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각양각색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라는 제품에 옵션으로 딸려 나온, 그래서 대수롭잖게 받아들이게 되는 그렇고 그런 것들의 향연. 계기가 있어야 비로소 그런 것들의 생성과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고답적인 사고의 터널에서 훌쩍이던 아이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누가 만들었든 스스로 태양을 드러냈든 창조 혹은 탄생의 과정 없이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 자체가 아니더라도 사물에 색깔이 비껴 외양을 드러내는 데 일조하는 것에도 까닭이 있었을 텐데.... 필연적이라고까지할 수는 없더라도 사물은 제각각 존재의 이유를 하나 이상은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사물이 달리 보이지 않던가. 사물의 실체가 전과 다른 시각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사고 전환이 일지 않는 한 사실 우린 사물을 제대로는커녕 전혀 볼 수 없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장자크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보는 것들이야말로 제대로 보기가 가장 어렵다.
페르시아 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일곱 개의 초상》이라는 작품이 있다. 12세기말 니자미 간자비가 썼다. 니자미 간자비는 서기 5세기 사산제국을 통치한 바흐람 5세에게서 영감을 받아 색조가 지닌 아름다움이나 색의 장식성이 주조를 이루던 사회적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보폭을 취한다. 니자미는 색에 투영된 인간사, 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면면히 이어온 동시대인과 그 이전 세대의 삶과 그것의 기저에 흐르는 특별한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달리 생각하고 깊이 사고하는 습관이 몸에 배면 들의 풀 한 포기, 야산의 꽃 한 송이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하물며 도저한 인간사에 돋을새김 된 행동, 어떤 선택, 결정이 의미 없이 이루어지는 경우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로마를 불태운 네로와 같은 자의 어리석은 행위조차 그 뒤에 촉발된 제국의 멸망을 예견하는 단서가 되듯 큰 틀에서 보며 역사적 우연이나 필연이 결국 한 배에 난 두 자식과 같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듯하다.
심연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에게 가없는 자태를 희미하게나마 드러낸다 하지 않던가. 쉽게 잊히거나 별 뜻 없이 지나칠만한 어떤 장면에 니자미가 착목할 수 있었던 배경 또한 그와 같았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지적 한계로 온전히 밝힐 순 없지만 희미한 자태만이라도 규명하고 싶은 욕구, 대상이 역사의 전면이든 배면이든 니자미는 상관하지 않았다. 배면에 있던 어떤 것도 달리 보면, 설득력 있는 논거를 바탕으로 전면에 나서는 일이 허다하다. 니자미의 관찰 대상은 색이었다. 오만가지 색이 조화를 이룬 자연계에 살면서 얼마나 자주 색이 탄생한 배경이나 수많은 색이 존재할 필요에 관한 기초적인 까닭을 되새길까. 아마도 아예 없지 않았을까 싶다. 궁금증을 느꼈다 해도 잠깐 뿐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온통 잿빛이라는 생각은 상상조차 하지 않은 우리가 색에서 연유한 삶의 언어에그토록 둔감하다니 설핏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색은 우리 뇌와 세상이 만나는 장소다. 《컬러의 시간》에서 제임스 폭스는 폴 세잔의 말을 빌려 자신이 생각한 색의 비밀이 니자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음을 밝혔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이 책을 정말 우연히 발견하고 과거 어느 한 때, 특정할 수 없는 그날처럼 기억에 가물한 어떤 말을 떠올렸다. 마치 심연이 섣불리 자신의 전부를 넘기지 않듯 그 말은 자취로만 희미하게 남았었다. 전과 다른 시각으로 색에 관한 통념에 균열을 낸 역작이라는 평을 추억하고 단숨에 책을 골랐다. 손에 쥐고 있던 다른 책 두 권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