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릿한 생존의 기록 — 소설가 김훈을 만나다
프롤로그: 흑연 가루가 비산하는 고립의 영토
그의 집필실 문을 열었을 때, 내 코끝을 먼저 찌른 것은 오래된 절간의 냄새도, 서재의 안락한 종이 향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쇳가루에 가까운, 날카롭고 건조한 흑연의 비린내였다. 방 안은 기묘할 정도로 비어 있었다. 흔한 컴퓨터 한 대 없이, 낡은 책상 위에는 오직 각을 맞춰 깎아놓은 연필 수십 자루와 아직 채워지지 않은 원고지 뭉치만이 놓여 있었다. 그 적막함은 평화롭다기보다 차라리 전운이 감도는 전장(戰場)의 고요에 가까웠다.
책상 옆에 놓인 그의 자전거 '풍륜'의 타이어에는 어딘가에서 묻혀온 마른 진흙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흙먼지에서 길 위를 들이받으며 살아온 한 사내의 완고한 생애를 읽었다. 김훈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말 위에 올라탄 장수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흐릿한 노인의 그것이 아니라, 먹잇감을 포착한 매처럼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곳에서 관념적인 미사여구는 단칼에 베어질 소모품에 불과할 것이라는 공포 섞인 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서사의 골격(骨格): 형용사를 죽이고 얻은 생존의 언어
나는 그의 손등을 보았다. 연필 가루가 모공 사이에 박혀 거뭇하게 변한 그 손은 문학가의 손이라기보다 대장장이의 손에 가까웠다. 그는 인터뷰 내내 책상 위에 놓인 칼로 연필을 깎았다. 서걱, 서걱. 나무가 깎여 나가고 흑연의 심이 날을 세울 때마다 방 안의 공기는 1도씩 낮아지는 듯했다.
질문: “작가님, 사람들은 당신의 문장을 ‘조사 하나로 세상을 베는 칼’이라 부릅니다. 『칼의 노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에서 ‘꽃은’과 ‘꽃이’ 사이의 사투는 이제 신화가 되었죠. 하지만 독자로서 저는 가끔 두렵습니다. 왜 그토록 감정의 살을 다 발라내고 오직 뼈만 남기려 하십니까? 형용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그 건조한 사실들이 작가님에겐 어떤 구원입니까?”
그는 깎던 연필을 멈추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내 질문 속에서 불필요한 형용사를 골라내려는 듯했다.
“형용사는 인간의 비겁한 자의식입니다.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간, 노을이라는 객관적 사실은 사라지고 화자의 기분만 남게 되죠. 하지만 굶주린 군사들에게 노을은 곧 닥칠 추위와 죽음의 예고일 뿐입니다. 사실(Fact)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비명 지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무슨 수식어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나는 내 감정으로 독자를 오염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노을이 졌다는 사실, 밥이 끓는다는 사실, 칼이 살을 가른다는 그 물리적인 진실만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문장이 단단해져야 삶의 비루함을 견딜 수 있습니다. 나에게 글쓰기는 아름다움을 빚는 공예가 아니라, 허무라는 괴물의 아가리에 끼워 넣는 단단한 뼈대입니다.”
칼과 연필: 역사라는 거대한 허무와 싸우는 법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땅처럼 마른 소리를 냈다. 그는 서재 벽에 걸린 지도를 가리켰다. 거기엔 그가 소설 속에서 누볐던 남한산성과 울돌목의 지형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민족'이나 '대의'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가마솥', '똥물', '썩은 발가락' 같은 지독하게 구체적인 단어들을 골라냈다.
질문: “작가님이 그려낸 이순신이나 김상헌은 영웅이라기보다, 당장 내일의 끼니와 부하들의 동상을 걱정하는 지독한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작가님에게 역사란 거창한 시대정신이 아니라, 개인이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구체적인 고통'의 집적물인가요?”
“역사는 위엄 있는 서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두려움에 떨며 변을 보는 육체들의 비릿한 신음소리죠. 나는 영웅을 찬양하러 그 시대로 가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 지옥 같은 한계 속에서 '살아서 죽어야 했던' 한 인간의 고독을 한 줄씩 파내려 갈 뿐입니다. 이순신이 무서웠던 건 적군의 함대가 아니라, 자신의 칼끝에 묻은 살의와 굶주린 병사들의 눈빛이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허무는 바다처럼 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그 엄중한 사실. 그 불가능한 소통을 나는 연필이라는 칼을 들어 원고지 위에 새길 뿐입니다.”
길 위의 사유: 자전거와 함께 마주한 비릿한 생명력
나는 방 한구석의 자전거를 다시 보았다. 그 자전거는 작가의 신체가 확장된 도구처럼 보였다. 그는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을 말할 때 비로소 아주 잠깐,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조차 이내 바람에 씻긴 듯 엄숙해졌다.
질문: “자전거 '풍륜'을 타고 전국을 누비며 만난 풍경들은 작가님의 고독을 치유해 주었나요? 아니면 길 위에서도 여전히 허무만을 확인하셨습니까? 책상 앞이 아닌, 길 위에서 만난 한국의 진짜 얼굴은 무엇이었습니까?”
“책상은 거짓말을 하기 가장 좋은 은신처입니다. 관념은 책상 위에서 몽상을 타고 자라나죠. 하지만 길은 정직합니다. 오르막을 오를 때 터질 듯한 내 허벅지 근육의 통증과 폐부를 찌르는 찬 공기만이 유일한 진실입니다. 나는 길 위에서 지식인이 아니라,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거친 손마디와 그들이 벌어먹는 밥의 무게를 보았습니다. 시장통의 비린내, 공사 현장의 흙먼지, 자식의 학비를 위해 진흙탕을 구르는 아버지들의 등판... 그곳에 진짜 문장이 있더군요. 관념은 가짜입니다. 육체로 직접 들이받고 감각으로 확인한 것만이 내 문장의 뼈대가 됩니다. 나는 작가이기 전에 한 명의 목격자로서, 이 땅의 비릿하고도 질긴 생명력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밥의 존엄성: 인간을 정의하는 가장 낮은 곳의 진실
인터뷰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작가는 부엌으로 가서 물 한 컵을 마셨다. 물을 마시는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 단순한 행위조차 그에게는 엄숙한 의식처럼 보였다. 나는 그가 쓴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문장을 떠올렸다. 그에게 밥은 단순한 영양소가 아니라 생(生)의 가장 처절한 증거였다.
질문: “작가님의 글에는 '먹는 일'에 대한 묘사가 유독 처절합니다. 밥을 버는 일의 비루함과 고단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시죠. 작가님에게 '밥'이란 인간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신성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형벌입니까?”
그는 빈 컵을 내려놓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인간의 모든 고귀한 사상도 결국 밥그릇 안에서 나옵니다. 밥을 버는 일은 한없이 비루하고 지겹지만, 동시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존엄한 투쟁입니다. 굶주림 앞에서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고결한 사랑도 순식간에 무력해지죠. 나는 내 소설이 뜬구름 잡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독자들의 밥상머리에서 느껴지는 현실적인 무게를 갖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 밥을 벌어 가족을 먹이고, 살아남아 다시 내일을 도모하는 것. 그 지루하고도 반복적인 행위야말로 인간이 거대한 운명에 맞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저항입니다. 밥은 굴레인 동시에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게 하는 유일한 닻입니다.”
에필로그: 부서지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연필을 깎다
인터뷰를 마치고 작업실을 나설 때, 그는 배웅 대신 다시 연필깎이 앞에 앉았다. 사각사각, 연필이 깎이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 소리는 마치 자신의 살점을 깎아 문장을 만드는 수도자의 고행처럼 들렸다. 김훈의 문학은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그는 독자의 등을 다독이는 대신, "이것이 너와 내가 딛고 선 삶의 바닥이다, 그러니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보고 견뎌라"고 서늘하게 일갈한다.
와크텔의 문법으로 이 만남을 정의하자면, 김훈은 ‘허무라는 거대한 괴물과 대등하게 싸우기 위해 자신의 문장을 스스로 뼈로 만든 전사’다. 그와 헤어져 도심의 번화가로 나왔을 때, 사람들의 화려한 옷차림과 쏟아지는 광고 카피들이 한낱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내 가방 속에는 그가 건네준 흑연 냄새 밴 원고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거기엔 아무런 형용사도 없었지만, 그 어떤 문장보다 묵직한 생의 하중이 실려 있었다. 그는 오늘도 그 황량한 작업실에서, 단 한 줄의 진실을 위해 뼈를 깎는 행군을 멈추지 않고 있을 것이다.
본 글은 엘리너 와크텔의 인터뷰 스타일을 차용하여 작가의 실제 인터뷰와 작품 세계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