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로 없는 고민과 부서진 감정의 회복

《위대한 대화》의 찰스 핸디편 인터뷰를 읽고, 슬라보예 지젝을 떠올리며

by 콩코드


변화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등잔으로 불을 밝혔고 디젤 엔진으로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렸어요. 저 또한 들불처럼 일어나는 기술혁명을 목격했지만 삶의 근원적인 질문은 바뀌지 않더군요. 무엇이 공정한가? 친구는 누구인가? 사랑과 용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에 대한 답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웹스키의 소설에서 배웠어요.


《위대한 대화》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 책은 '대한민국의 최전선 인터뷰어'로 그 바닥에 소문 난 김지수가 쓴 인터뷰집입니다.



책의 세번째 인터뷰이로 찰스핸디가 나옵니다. 찰스 핸디는 경영 사상가로 알려진 인물이죠. 아마 여러분들도 보셨을 겁니다.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를 찰스 핸디가 썼거든요.



그 책에서 찰스 핸디는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지혜를 이렇게 말합니다.



“기술 혁명이 들불처럼 일어나도 삶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 편지에 내가 네 나이였을 때 할아버지에게 묻고 싶었고 듣고 싶었던 이야기들, 세상에 나가 삶과 직접 부딪치며 나만의 미래를 만들어가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담았다.”



그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인터뷰집에서도 그는 그가 평생을 천착한 근원적인 질문을 잊지 않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정작 중요한 질문을 놓치지 말기 바라면서 말이죠.



찰스 핸디를 통해 다시 질문의 중요성을 곱씹게 되었습니다. 질문이 지닌 함의와 통찰에 격하게 공감하며 관련 글을 여러 번 썼는데도 또 잊었습니다.





전 여러 글에서 "답을 찾기 전에 문제부터 정의하라"던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인용해 왔습니다. 답을 내는 일에만 관심 있는 세태를 호되게 질책하는 그의 말이 제게 울림을 넘어서 전율처럼 다가왔었거든요.



이 글에서도 전 슬라보예 지젝의 언명을 찰스 핸디의 근원적 질문의 의의와 연결지을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정답과 질문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질문 없이 답이 있을 수 없죠.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문제를 적확하게 모르면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찰스 핸디가 근원적인 질문에 관심을 가질 것을 권고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쓰고 보니 더 멋쩍어집니다. 사람과 일에 이리저리 채이면서 요즘 부쩍 인간사가 힘들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환경을 바꿀 수단마저 없다는 고립무원의 감정도 없지 않았고요.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와 가슴 사이의 거리라는데 딱 저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여전히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는 알지 못하는 거죠.



돌아보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드러난 결과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퇴로 없는 고민과 부서진 감정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에 따라 내가 원하지 않는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질문이 올바랐다면 그 답은 문제가 없죠. 질문을 잘못 제기했다면 거기서 나온 답은 충분히 왜곡될 수 있습니다. 바로 잡자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질문 어디에 무슨 잘못이 있는지 살피는 게 우선입니다.


기억 상실도 이 정도면 문제가 많습니다. 천석고황이라고 해야 보다 적절한 표현이겠지요. 그럼에도 감사한 마음은 늘 갖고 있습니다. 잊을 만 하면 여러분들이 등장해서 호되게 일깨워주니까요.



언제든 의존만 하고 살 순 없는데 걱정이긴 합입니다. 한 번 더 그분들의 말씀을 가슴에 아로새기는 것으로 가르침을 잊은 잘못을 대신합니다. 제 얘기만 했습니다.



이 글에 담고 싶었던 건 장작 다른 이야기입니다. 바로 근원적인 질문과 그 질문에 내재된 명징함에서 찰스 핸디와 슬라보예 지젝이 자신들의 통찰과 금언을 아낌없이 전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시대에 근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어느 시대에나 유효한 그 질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세상을 설계하거나 바꾸는 단초라는 것 말이죠.



위에서 아래로 찰스 핸디, 슬라보예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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