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시계를 잊은 채 출근하고 음식을 태우는 것도 모자라 남의 글을 내 글로 오인하기까지"
이상징후
아침에 더러 손목시계를 차고 나오지 못했다. 지갑을 통째로 놓고 나오는 때도 있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착잡한 심정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에는 서둘러 재갈을 물렸다.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주의할 밖에. 그 후 며칠은 정말 시계를 잘 차고 나왔고 지갑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상황이 순조롭게 정리되는 듯했다. 사흘 전 프라이팬에 언양식 납작 불고기를 올리고 가스불을 켰다. 익는 틈을 타 더위로 끈적해진 몸을 씻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지저분해 보이는 선반을 정리하고 욕실 문을 열었다. 아차차. 매캐한 냄새와 뿌연 연기가 거실에 가득했다. 자동제어시스템이 과열 기미를 눈치채고 가스를 차단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불고기는 새카맣게 탔고, 프라이팬에선 연신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마시던 커피는 오후 2시 이후로는 안 마시기로 했다. 벌써 한 달이 됐다. 카페인이 건망증을 일으킨다는 의학적 소견은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술? 500ml 들이 맥주를 캔으로 마신다. 하루 2개에서 4개까지. 시간을 달리하며 나눠 마시기는 하지만 적지 않은 양이다. 알코올성 치매는 아니라고 믿으면서도 전례 없이 깜빡하는 증세가 거듭되는 통에 사실 놀랐다. 이참에 맥주를 끊거나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안을 떠올렸다. 커피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맥주를 끊는 건 아직은 어려워 보인다. 다행이라면 굳이 멕주를 마시고 싶지는 않다는 것.
일정은 6개월 전부터 캘린더 앱에 틈틈이 적고 있다. 한계는 있다. 알람을 요청한 기간이 지나면 캄캄무소식이라는 것. 365일 알람을 설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중요 사항을 따로 적기로 했다. 역시 전에는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 통과의례라고 둘러댔다.찜찜한 생각은 거두지 못했다. 우선 이번 달 뒤 10월까지 해결할 일 목록을 옮겨 적는다.
- 맡긴 책 회수하기.
어림잡아도 5백여 권이다. 사무실에 부린 책을 합하면 6백 권에 달한다. 하루에 4권씩 옮기기로 했다. 150일, 5개월이 걸릴 예정이다.
- 늦어도 10월까지는 유럽 여행.
7월 중순까지는 세부 계획을 짜야한다. 자유여행으로 돌리려면 애들과도 일정을 조율해야 한다. 손흥민이 어느 클럽으로 갈지도 변수다. 이적이 결정되면 그 나라를 여행지에 포함해야 한다. 큰 애가 손흥민이 출전한 경기를 보고 싶어 한다.
- 제주 월셋집 알아보기.
내년 7월을 기점으로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로 했다. 그다음 지역으로는 통영과 부산이 물망에 올랐다. 제주는 연세가 주라는데 최근에 경향이 바뀌었는지, 아니라면 에어비앤비를 빌리는 방안을 염두에 둘지 등등 고려할 게 많다. 숙박지를 어디로 할지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 강의 준비.
원론 수준이지만 내후년 중순까지 강의를 맡았다.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나오지 않았다. 3개 분야 강의를 맡을 예정이라 원고부터 내실 있게 작성해야 한다. 지난 강의에서 참고한 원고를 다듬는 일이 급하고, 나머지 2개 분야는 원고를 새로 써야 해서 부담이 없지 않다. 경험상 잘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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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지난 수십 년간 맹렬히 책을 읽었다. 책 읽을 시간을 되도록 많이 확보하려다 보니 짬 나는 시간을 노리게 됐다. 티브이 보는 동안이나 방 청소를 하는 중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걷는 동안에도 책을 읽었다. 앞선 두 경우를 멀티플 한 독서법이라고 해두자. 이를테면 티브이를 보면서 책을 읽거나 물티슈를 발로 밟고 돌아다니며 책을 읽는 식이다. 그 시간 빌려 읽는 책의 양이 생각보다 쏠쏠하다. 후자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걸으면서 책을 읽으려면 시야가 사방으로 열려있어야 한다. 시선을 책과 책의 상하좌우로 분산해야 사고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동시에 책과 사위를 어떻게 볼 수 있느냐 싶겠지만 숙달되면 가능하다.
버스 안에서 책을 읽으면 어지럽다는 반응이 꽤 있다. 손에 든 책과 버스 진동이 일치하지 않아서 나타난 현상이다. 진동에 따라 책을 든 손이 같은 박자로 움직이게 두고 책에 시선을 고정하면 자연스럽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반복훈련을 전제로 말이다. 글러브로 공을 받을 때 공이 오는 속도를 가늠해서 글러브를 뒤로 당기며 공을 받으면 손이 덜 아픈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짬 날 때 책을 읽는 데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 단시간에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 한창 시끄러운 티브이와 방바닥을 미는 발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책에 코를 박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학창 시절에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책과 씨름하느라 적게는 20분에서 많게는 40여 분을 허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시험 기간에는 그게 큰 골칫거리였는데 대학생 시절을 거쳐 회사원이 되면서 순간 몰입도가 놀랍게 향상됐다. 그 시기에 틈만 나면 정말 게걸스럽게 책을 읽었다. 방학 때는 하루 10권씩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 외의 날은 적어도 4권 정도를 읽었던 것 같다. 넉넉한 시간을 활보할 수 있는 책상머리와 달리 틈나는 시간은 대부분 짧아서 속도를 내려면 순간 몰입도를 높여야 했다. 종내는 그 간극이 좁아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좋은 책을 보다 많이 읽으려는 욕심과 필요한 시간을 극대화하려는 의지적인 노력이 맞물린 결과였다. 처음엔 훈련이 되지 않아 힘들지만 계속 읽다 보면 어떤 장소, 어느 시간대든 상관없이 책을 펴면 바로 그 안으로 빨려드는 순간이 온다. 자투리 시간을 잘만 이용해도 하루에 책 한 권을 넉넉히 읽을 수 있다. 관건은 얼마큼 빨리 몰입하느냐에 달렸다. 다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속독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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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 저하
내게 고정 불변일 줄 알았던 집중력이 최근 들어 흐트러졌다. 이상 징후는 책 읽는 시간보다 핸드폰을 뒤적이거나 핸드폰으로 글 쓰는 시간이 더 많아진 데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책을 읽다가 습관적으로 핸드폰에 손이 가는 횟수가 잦았고, 마찬가지 이유로 책 한 권을 독파하는 속도도 확연히 떨어졌다. 변명거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나도 그럴 줄 몰랐다. 누가 묻지 않았는데 책을 읽는 중에 문자나 카톡, 또는 게시물 알람이 울리면 확인하지 않고 배길 수 있느냐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잠깐 글을 쓰고 책으로 곧 돌아오겠다는 다짐은 번번이 문턱을 넘지 못했다.
“고백하자면, 일생 동안 스스로 집중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갈수록 심해진다. 해야 할 일이 쌓이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나름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지만 돌이켜보면 무슨 일을 했는지 나열하기 쉽지 않다. 곰곰 생각해 보면 내 집중력을 깨뜨리는 요소가 너무 많아졌다. 일을 하려고 노트북 컴퓨터를 열어 찾아볼 내용을 검색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를 노렸다는 듯 온갖 자극적인 내용의 글이나 영상, 상품 광고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휴대전화에는 시시각각 메시지가 도착해 쌓인다. 이리저리 이끌려 클릭하다 보면 원래 하려던 일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하루를 흘려보낸 날이면 ‘난 왜 이렇게 집중하지 못할까? 의지박약이야’라고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평소 퇴고를 자주 하는 편이라 미리 끄적거린 글이 퇴고 과정에서 뒤로 밀리는 일이 잦았다. 지울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 다시 읽었다. 현재의 내 심경을 구구절절 잘 옮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글에 저 스스로 취하면 사실 답이 없다. 글 쓰는 사람의 지독한 병증 중 하나라고 해두자. 아뿔싸. 착각은 자유라던가. 글투나 심경이 나의 그것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위 글은 톱클래스의 객원기자 이선주가 〈디지털 디톡스 한 달, 내 뇌가 돌아왔다!〉는 제하의 기사에 쓴 글의 일부다. ‘도둑맞은 집중력’을 키워드로 검색한 위 글을 한창 쓰고 있는 글 밑에 복붙 한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위 글이 '집중력이 흐트러졌다'는 취지의 문장 맨 밑 부분에 이어지면서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런 일이 다 있다! 손목시계를 차지 않고 나온 경우나 음식물을 새까맣게 태운 사례와 비교할 때 이번 건망증은 예후가 좋지 못하다. 집중력을 도둑맞았더니 중증 건망증이 깃들었다! 으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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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집중력
영국의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는 《도둑맞은 집중력(Stolen Focus)》에서 집중력이 저하되는 현상을 개인의 집중력을 앗아가는 사회 문제로 다뤄 대중적인 관심과 공감을 얻었다. 개인의 의지박약에서 원인을 찾았던 전통적인 시각과는 확연히 다른 스탠스를 취한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저자는 전 세계가 집중력 위기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근거로 든 수치가 예사롭지 않다. “사무직 근로자가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 평균 3분을 넘기지 않는다. 집중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진단받는 어린이가 저 어릴 때보다 무려 100배나 늘었다.” 그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집중력 문제를 심각하게 겪는 걸 보고 나서는 세계 곳곳의 전문가를 찾았다. 그 일환으로 그는 마이애미, 몬트리올, 멜버른, 모스크바 등 세계를 누비며 200명 이상의 손꼽히는 전문가들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물이 이 책, 《도둑맞은 집중력(Stolen Focus)》이다. 그는 먼저 집중력을 흩트리는 요인에 주목했다. 첨단 기술의 등장, 직장에서 일하는 방식, 먹는 음식, 대기 오염, 수면 부족, 학교 교육 방식 등이 요인으로 지목됐다. 그는 집중력 문제를 겪는 이유가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해당 문제에 실질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을까?
한적한 도시를 찾은 그는 석 달 동안 디지털 디톡스를 했다. 그날의 경험을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친구에게 맡긴 후 여행을 떠나 석 달 동안 인터넷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2주 정도 지났을 때 강렬한 금단 증상을 느꼈죠. 20년 동안 수없이 주고받던 문자와 페이스북 메시지, 전화 통화가 뚝 끊기니까 세상이 내게 ‘넌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4주가 지날 무렵에야 해방된 느낌이었습니다. 드디어 내가 원하던 독서와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는 상태가 됐죠. 해변에 접이식 의자를 펼쳐놓고 앉아 온종일 책을 읽은 후 ‘드디어 내 뇌가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석 달 동안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하기란 어려울 거예요. 그러나 일상에서 조금씩 실천할 방법은 찾을 수 있고, 찾아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