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네쓰케: 세기말 극단의 파리, 빈, 도쿄를 비춘 거울

호박 눈의 산토끼

by 콩코드


네쓰케를 소유한다는 것, 그 전부를 상속받았다는 것은 단지 물건뿐만 아니라 한때 그것을 소유했던 사람들에 대한 책임까지 물려받았음을 의미한다. 그 책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나는 혼란스럽다.



제목만으론 가늠하기 힘든, 《호박 눈의 산토끼》

네쓰케는 나무나 상아로 만든 주먹만 한 크기의 장신구다. 각양각색의 사물(동식물, 인물 등)을 소재로 정교하게 만들어 인기가 많았다. 장식용 외에 성적 기구로도 더러 활용되었다고 한다. 《호박 눈의 산토끼》는 소재로는 생소한 장식용 목기와 도기에 얽힌 이야기를 가족사로 갈무리한 에세이다. 신선한 소재에는 비상한 관심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아니라면 촉수를 자극하는 데는 성공적이라는 평이 가능하다. 네쓰케를 사이에 두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혹 미스터리? 아니면 애잔한 이별이라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읽고 싶어 거의 미쳐버렸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또 다른 생각이 구매력을 밀쳐내고 있었다. 불광불급, 미쳐야 미친다는 말은 맞지 않을 수 있다. 미친다고 다 목표에 도달하는 건 아니다. 속칭 꼭지까지 돌지 않으면 종종 허사에 그치기도 한다.



서두가 지닌 마력, 무슨 사연이라도?

전부터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외 인문 서적 몇 권을 곁에 두고 있었다. 반나절이 지났다. 낮 동안 머릿속을 종횡무진 누비던 그놈의 그림자는 꿈에서도 사라질 줄 몰랐다. 이튿날. 책을 손에 넣고 내친김에 매대 한쪽에 놓은 의자에 앉았다. 과연. 역시. 감탄사를 연발하며 읽어낸 책장이 열두어 페이지에 달했다. 그 정도 분량이면 여태 서두 한복판이라 보통은 줄거리 흐름이 주로 등장인물과 각 인물의 성격에 관한 묘사, 배경 설명에 할애되기 마련이다. 지루하더라도 독자로선 통과의례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짜장면이 나오기 전에 주인장이 내온 양파와 단무지를 씹는 맛이랄까?



본식을 기대하게 하는 맛, 양파와 단무지

양파 특유의 알싸한 맛과 단무지의 새콤 달달한 맛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서두는 그렇듯 잔잔한 파문과 같은 맛을 의도하지 않고, 본식을 고대하게 하는 암시(주방에 흘러나오는 냄새)와 복선(생각보다 빨리 음식이 나올 것 같은)을 깔아놓지 않는다. 휘황찬란한 스포트라이트와 열렬한 박수를 장만한 레드카펫은 준비할 생각조차 없다. 그저 서두는 길 안내역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다. 올여름엔 세계 명작 소설 한두 권쯤 반드시 읽어내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도 한 번 더 장렬하게 전사하는 경우가 서두에서 유독 잦은 이유도 매양 같다. 트랩을 밟을지언정 예서 중단하지는 말자는 결기를 이 책에선 보기 좋게 버려도 좋다.



네쓰케, 작은 장신구에 깃든 대비

친척에게서 264점에 달하는 네쓰케를 물려받은 저자 에드먼드 드 발은 대체 그 많은 장신구가 어떻게 친척의 손을 거쳐 자기에게 돌아오게 됐는지 그 전 과정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책의 배경으로 등장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 유럽과 일본은 용광로가 들끓던 격동기였다. 그 시기 명문가로 우뚝 선 에프루시 가문은 나치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하루아침에 몰락한다. 그 시기는 성장과 몰락이 뒤엉킨 채 부유하는 거리 뒷골목이었다. 그 거리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휴지 조각과 화려한 전단이 나뒹굴었다. 그 극단적인 모습을 저자는 파리와 빈, 그리고 도쿄에서 찾았다. 그 시절 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벨 에포크 시대를 구가했다. 반면 빈은 파시즘이 거리 곳곳을 누비며 광란의 끝을 보여주었다. 전쟁 포화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된 도쿄는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한 채 복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치 빈과 파리, 도쿄가 생성, 성장, 사멸의 극단을 상징하듯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우린 두 도시 사이에 발을 걸치고 있다.

어떤 역사나 시기, 사람이든 생성, 성장, 사멸의 과정을 밟는다. 경우에 따라 그 과정이 마구 섞이고 본데없이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각 단계에서 비끼는 예측가능한 패턴이나 불측의 어떤 선택에 관해 재단하기는 이르다. 이름 모를 장인의 손에서 정교한 장신구가 빚어지듯 어느 국면에서든 꽃은 피어난다. 스러지는 것도 있다. 자멸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정신으로라도 살아남는 것, 그것이 불멸의 승리다. 아주 작은 네쓰케에 깃든 큰 울림도 마지막 한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데서 비롯한다. 대비에서 비롯되는 가장 강렬한 효과는 각인이다. 찰스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최고와 최악이 혼재하며 후과를 다투던 그 시기는 자포니즘(일본 문화 팬데믹)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르누아르와 드가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당대 일본풍에 열광했다. 그중에는 네쓰케도 있었다. 요하임 에프루시의 손자 샤를이 네쓰케를 모았고, 그 후 샤를은 빈에 사는 사촌 빅토어의 결혼선물로 네쓰케를 보냈다. 그렇게 5대를 이어 저자의 손에 네쓰케가 들어온 것이다. ‘호박 눈의 산토끼’는 264점의 네쓰케 중 하나다. 저자는 영국 태생의 도예가이자 작가다. 2010년에 출간된 후 이 책은 《가디언》지에 의해 ‘올해의 책’,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으로 선정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