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과 인터넷은 인류의 손안에 세상을 안겨주었습니다. 한두 번의 클릭만으로 인류는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경제/사회/문화 동향을 빈틈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모든 정보가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발명 후 세월이 흘러 중간 손익계산을 할 때가 되자 뒤늦게 인류는 발명품의 보급과 확산으로 인한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진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요즘엔 그 이기들이 물리적 거리를 획기적으로 앞당기고 소외의 문제에 답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는 듯합니다.
전 세계가 사실상 1일 생활권으로 묶이면서 이틀이 채 걸리지 않은 시간 안에 세계 곳곳을 여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류는 과거 부족민이 그랬듯이 자기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과거엔 타 부족에게 해코지당할까 싶어 부족 간 경계를 넘지 않았다면 이젠 인터넷을 탑재한 핸드폰으로도 충분히 그곳 소식을 듣고 볼 수 있어 국경을 넘나들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물리적 거리가 늘어난 느낌입니다. 마치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심장까지의 거리라고 하는 말처럼 말입니다. 폭넓은 소통의 도구로 사용될 줄 알았던 SNS는 오히려 정치적 견해나 취미가 같은 사람들로 구성원이 한정되면서 가뜩이나 옹색해진 그들만의 리그, 열띤 경연장이 되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였지만, 인류에게 불을 건넨 프로메테우스는 지구를 떠받쳐야 하는 천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류도 이 이야기에서 파생된 판도라의 상자로 전례 없는 재앙에 직면합니다. 어떤 도구든 양면성이 있습니다. 잘만 사용하면 대단히 유용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예상치 못한 참사에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인류에서 선사한 이익이 적지 않습니다. 위에선 포괄적으로 그 양태를 적었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살피면 훨씬 많은 선례가 포착될 겁니다. 자주 언급되는 폐해 중에는 가상현실을 실재와 혼동하거나 아예 가상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씁쓸한 일입니다. 관련 데이터는 찾을 수 있다면 입을 떡 벌릴 정도의 수치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도구를 잘 다루기로 소문난 호모 파베르가 실재와 가상현실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을 리 없다는 데 우린 흔쾌히 동의할 수 있지만, 동의와 별개로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습니다. 현실 혼동 혹은 진짜와 가짜를 동일시한 사용자의 일탈이 심심찮게 보도되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대단히 역설적입니다. 경악할 역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면 말입니다. 그 역설은 일부 사용자들이 실재와 가상현실을 뒤섞는 까닭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저자가 언급한 대로 우린 인류가 실재하는 세계와 단절되는 데 크게 공헌한 도구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 도구를 잘못 휘두르면 어떤 현상, 곧 고독, 우울, 무기력, 권태 등의 병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잘 압니다. 저자가 제시한 처방 또한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야기한 병증을 치유하려면 “구성원 안으로 들어가 활발히 교류하라,” 정도가 예상되는 답안 중 하나에 해당할 겁니다. 어쩌면 그 답안이 정답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역시나 저자는 밖으로 나가 세상을 만나고, 모험하고, 즐기라고 강조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린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병증엔 푹 쉬라는 뻔한 처방을 따라야 할 때가 있습니다. 푹 쉬면 날 병을 자꾸 몸을 놀려서 키우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실재와 가상을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경우를 유형별로 나누면 아마도 무척 다양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면 견디기 힘든 집단 괴롭힘에 스마트폰과 인터넷이라는 자기만의 방에 기꺼이 구속된 경우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돌파구 잃은 세상을 등지고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도피처로 택한 예도 있을 겁니다. 이런 사례는 극단적인 예에 해당합니다. 보통은 같거나 유사한 상황에서 자신 속으로 침잠하는 쪽을 택합니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관계가 석연치 않은 방향으로 흐를 때 대다수가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시간을 성찰로 갈무리하면 나무랄 데 없겠는데 그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어느 경우든 그 시간이 오래가서는 곤란합니다. 처음엔 아주 짜릿하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 수 있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그 틈에서 부대끼는 경우와 달리 이내 권태 혹은 무기력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 큰 강도의 자극을 찾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증상들이 쌓이면 고독감이나 우울 증세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땐 그곳이 더는 헤어날 길 없는 감옥처럼 보이게 될 겁니다. 가까스로 곰을 피했더니 사자를 만나더라는 얘기는 우스갯소리로 그쳐야 합니다.
환기가 필요할 때 창문을 활짝 열 듯이 우리 인생에도 바람을 깃들게 해야 합니다. 때론 선풍기 바람이 유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론 궁극의 시원함을 맛볼 수 없습니다. 긴 시간이 지나 모터가 과열되면 더는 전과 같은 바람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연풍은 계속해서 나뭇가지와 숲에서 비롯된 생기가 바람 안에 깃들어 늘 상쾌함을 유지할 수 있는 반면에 선풍기 바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가득한 진짜 삶의 출발선에 다시 설 수 있다면 우린 가없는 데까지 시선을 던질 수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예전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모험심, 에로스, 사생활, 일상, 실존, 탈주의 바람을 책에 가득 옮겨 놓았습니다.손풍에 돛을 다는 건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