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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 Aug 23. 2024

[직장백태] 허울뿐인 관계 이상을 바라지 말라

캐비닛 탈취 기도, 용도가 의문인 게시판


# 어떤 게시판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사후 조치가 없다면 의견 수렴이라는 순기능을 차버린 것과 다를 바 없어. 일종의 마스터베이션(배설 용도)으로 설계했다면 할 말은 없고. 그러려고 전국을 대상으로 게시판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진 않았을 텐데. 게시판에는 하루가 멀다고 수없이 많은 문제 제기가 올라오지만, 현장의 반응은 거의 없는 실정. 현장에서 구태가 근절되지 않는 건 문제에 상응하는 조치가 없기 때문. 그럴 거면 뭣 하러 게시판을 만들었는지 의문. 그냥 불만을 쏟아놓기만 하라는 건지, 가시적인 조치가 있든 없든 그건 당신 소관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겐지 도통 알 수 없어. 이는 마치 과거 3S 정책을 보는 느낌. 주의를 돌리려는 고도의 정책적 선택이 3S, 즉 스포츠, 스크린, 섹스로 발현된 것처럼 불만이 확대되는 걸 막을 뜻에서 일종의 해우소(?)가 필요했던 건 아니겠지?





# 평소엔 “가족”,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개인 책임”


전날 A는 회사 감찰 부서의 불시 점검에서 개인 캐비닛 잠금장치가 풀려 있다는 이유로 감찰 지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수개월 전 일이지만 석연치 않은 점 때문에 뇌리에 계속 남았던 듯합니다. 불현듯 그날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사건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감찰 당일 A는 부서 주임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A는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과연 닫힌 캐비닛 문고리를 당기자, 잠금장치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주임이 A에게 보이려고 망가진 잠금장치를 본래 위치에 끼워 맞춘 뒤였습니다. 주임에 따르면 감찰 부서에서 캐비닛 문고리를 당기자 캐비닛이 너무 쉽게 열렸다고 했습니다. 잠금장치가 망가진 상태를 확인하고도 감찰 부서는 잠기지 않은 건 사실이니 주임에게 사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답니다. 이에 대해 주임은 별다른 항변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대단히 아쉬운 장면으로 A에게 기억되습니다.)



A는 사실관계부터 확인하자고 요구했습니다. 우선 A는 이 사항은 잠금 미 조치로 지적될 사안이 아니라 잠금장치 교체로 귀결되는 것이 마땅한 사안이라는 점을 거듭 주장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캐비닛 주인이 잠금장치가 망가진 사실을 알고도 방치했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불시 점검에서 지적될 확률이 높은데 그럴 수 있겠느냐는 뜻에서 입니다. 합리적으로 추론할 때 캐비닛 주인이 자신의 캐비닛 잠금장치가 망가진 사실을 알았다면 곧바로 부서에 알려 잠금장치를 교체하는 게 일반적인 행동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A가 잠금장치를 망가뜨리고도 그대로 두었다는 오해를 하는 것 같아 앞서 보는 바와 같이 같은 취지의 말을 반복해서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임과 그새 주임 곁에 와 있던 주임의 직속상사는 A의 말에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A가 서둘러 사실을 인정하고 넘어가길 바랐습니다. 그들은 고작 사유서 한 장 쓰는 게 뭐가 어려우냐, 는 눈치를 애써 감추지 않았습니다. 개별적 차원에서 간단히 정리될 문제가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거부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자주 봐왔던 행태입니다. 그들은 평소 업무 차원에서 A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도 서로 척을 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이 터지자-사실 큰일도 아닙니다. 큰일이 아니라는 그들의 말은 옳습니다- 그들은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이건 ‘당신이 시인하고 해결할 문제’라고 그들은 빠르게 사안을 정리했습니다. 부서 운영에 대한 책임을 진 그들이 말입니다.



그 대가로 회사에선 그들에게 남들보다 빨리 승진하거나 좋은 평가를 얻도록 했습니다. 내부 구성원들은 그런 그들을 존중하고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상황이 좋을 때만 해당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특정 캐비닛이 잠금장치 미조치로 지적을 받은 사실이 그간의 관계를 일거에 무너뜨릴 만큼 중대했는지 A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달랐습니다. 말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하면서 행동은 부서 차원의 대응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하든 하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영악하게도 그들은 은근한 행동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전했습니다.





부서장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마당에 주임이나 주임의 직속상사가 다른 태도를 취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얼마간 생각이 있었다면 도리어 피해자 편에서 섰을 테지만 그들 역시 권력의 부침에 부유하는 나약한 인간군상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부서장의 비상식적인 언행과 무례한 태도에 이의를 제기한 뒤 A는 부서장과 관계가 틀어져 있었습니다. 그간의 태도를 보면 부서장이 사건에 관해 A를 두둔할 입장을 세웠을 리 만무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부서장의 입장을 A에충실히 전달했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판단일 것입니다. 주임과 직속상사가 독단적으로 A를 몰아세우는 결정을 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큼 그들은 독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들의 행동 패턴이 탐탁지 않아 A는 조금 더 세세한 부분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 캐비닛에 서류를 넣고 며칠 후 열쇠를 분실한 사실이 있으며, 다시 꺼낼 서류도 아니어서 열쇠를 새로 맞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열쇠를 잃어버린 이후로는 캐비닛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잠금장치가 망가졌다면 나 아닌 누군가가 캐비닛을 열려고 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내부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동시에 마치 A가 개연성 없는 의혹을 제기하기라도 하는 듯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보았습니다. 그런 후 하는 말, “누가 그걸 밝혀요? 또 어떻게요?” 그들의 얼굴엔 그렇게 의혹을 제기할 만큼 큰 사안이냐는 표정이 스쳤습니다. 이어서 그들이 사전에 입을 맞춘 듯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쐐기를 박듯 말하는 통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오래돼서 망가진 거예요.”. 지나고 보니 이 부분에서 의도를 알아차렸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왜 사건을 서둘러 봉합하려 했는지.



사무실에는 수십 개의 캐비닛이 있습니다. 캐비닛을 산후로 겨우 1년이 조금 지났을 뿐입니다. 그 기간에 잠금 뭉치가 자연적으로 훼손되었다면 다른 캐비닛도 온전하지 못하거나 적어도 몇 개 정도는 망가져야 사리에 맞습니다. 하지만 A 것 외에는 어느 것이든 전부  멀쩡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왜 이들이 서둘러 사건을 봉합하려 헸는지 의문이지만 알 길이 없습니다. 그땐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하지 않는 한 내부인 중 누군가가 무슨 의도로 캐비닛을 열려했는지 규명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계속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A가 부담을 느낄 것이라는 점도 그들은 미리 추정으로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누가 남의 캐비닛을 열려고 했을까요? 그는 완력으로 문을 열려고 했습니다. 타인의 캐비닛 안에 그가 시급히 찾아야 할 어떤 서류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그에겐 어떤 숨은 의도가 있었을까요? 정상적인 경우라면 캐비닛 주인에게 캐비닛을 열어달라고 했겠지요. 그에 앞서 누구라도 남의 캐비닛 안에 있는 제 것 아닌 어떤 것을 뒤지려 할 리 없습니다. 무슨 혐의(?)를 잡지 않고는 말입니다. 누가 봐도 무리하게 캐비닛을 열려고 하다가 잠금장치를 손상케 한 정황이 명백한데 부서에선 이렇다 할 조치라곤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흔한 경위 파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부서에서 방관하는 동안 A는 감찰 부서의 지적이 어떤 점에서 부당한지 완곡하게 표현한 사유서를 냈습니다. 직후 감찰 지적은 없던 일로 되었습니다. 관계기관에 수사를 의뢰하든, 감찰 부서에 조사를 요구하든 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경위를 따져보지도 않고 문제를 서둘러 봉합한 건 물론이고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등의 치졸한 관행(!)도 얼마간 고쳤을 텐데, 기회를 놓쳤습니다. 유사한 사안에 맞닥뜨릴 경우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위와 같이 정리될 필요가 있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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