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늠이 되지 않을 땐 생각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가능한 일인지 불가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가늠이 되지 않는 일에 무작정 달려들면 비웃음을 사기 쉽습니다.
세간에선 견적을 잘 내야 한다는 말로 이 경우에 답을 합니다. 견적은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비용 따위를 미리 어림잡아 계산하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통칭해서 단체도 판세를 잘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또 어떤 짓을 벌이는지 안개 속에 갇히게 됩니다. 자신이나 단체에서 뱉은 말이 자신과 단체에 올무가 되는 까닭이 종종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누군가가 과거에 했던 말과 정반대의 말을 스스로 뱉고 있는 줄 의식하고 있으며, 거기서 비롯된 행동이 본인과 단체에 불리한 파장을 몰고 올지 예측하고 있다면 예사롭게 다루어선 안 됩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 은 일종의 '확신범'이라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대중 일반에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자신이 속한 단체에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면서 유불리의 판단 기준을 단체에 미칠 악영향 여부에 두고 있을 거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면 대단히 순진하다고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가 말을 하면 화자가 되고 듣는 사람은 청자가 됩니다. 그에게 청자가 일반 대중일까요? 그에게 청자는 특정인들입니다. 사실을 왜곡해 알려줘도 찰떡같이 진실로 믿는 특정인들, 맹목이 신념이 된 사람들, 그런 자들에게 그가 메시지를 내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아래 영상이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문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역지사지로 보면 그간의 사정을 적잖이 간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애를 쓴들 그들이 변형이 불가능한 소파를 차 트렁크에 넣을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차주에게는 자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정도의 수준으로 소파를 넣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여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합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짝짜꿍'이 맞는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헛되이 수고하는 그들만 피곤할 뿐입니다. 계속 우겨 넣는다면 소파는 물론 차도 손상을 입을 게 뻔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