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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이 웃긴 철학을 찾는다면

유쾌한 스콧 허쇼비츠와 그의 아들 형제에게 부탁하는 것도...

by 콩코드


‘못 말리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이 웃긴 철학책’. 솔깃하게 와 닿는 제목의 책을 만나면 양가감정이 들곤 하죠. 그렇다고 종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지 않는데 전 두 가지 감정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쪽에 늘 섭니다. 또 선택이 바뀐 적도 과히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이럴까요? 초반부터 밥맛 떨어지게!



솔깃하게 와 닿는 제목에 한한 ‘양가감정’이란 글의 함량이 기대 수준에 미달하다 보니까 제목이라도 그럴듯하게 꾸미려는 욕심이 지나쳐 산으로 간 결과가 그렇게 솔깃한 제목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됐으리라는 짐작이 한 축을 이루고요. 오랜만에 특정 독자층을 겨냥해 정말 배꼽 쏙 빠지게 쓴 책이 독자 손에 들려지게 됐구나 싶은 반가움이 또 다른 한축을 이룹니다.



양가감정이란?
등가 1. 글의 함량이 기대 수준에 미달하다 보니까 제목이라도 그럴듯하게 꾸미려는 욕심이 지나쳐 산으로 간 결과가 그렇게 솔깃한 제목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됐으리라는 짐작
등가 2. 오랜만에 특정 독자층을 겨냥해 정말 배꼽 쏙 빠지게 쓴 책이 독자 손에 들려지게 됐구나 싶은 반가움.



반가움도 잠시 이 ‘반가움’은 이내 의구심에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의구심의 정체란 이렇습니다. 책이 다룬 소재가 일반 대중이 어렵게 생각하는, 정확하게 말하면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철학서에 관한 한 아무리 쉽게 쓴들 골이 패는 건 거기서 거기일 거라는 대중 편향적인 동조와 대학 초년 시절 교양과목으로는 유례없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던 학문이었던 경험이 화학적으로 결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그 후로도 철학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마치 약장의 감초처럼-표현의 적절성을 차치하고-제 안에 열패감의 실체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서서히 조여오는 ‘어둑서니’와 같은 존재하고 할 수 있죠.



의구심의 실체는?
1. 철학서에 관한 한 아무리 쉽게 쓴들 골이 패는 건 거기서 거기일 거라는 대중 편향적인 동조2. 대학 초년 시절 교양과목으로는 유례없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던 학문이었던 경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어둑서니는 아무래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버거운 상대를 너무 일찍 끌어들인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입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치기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로는 그것만 한 게 없을 듯도 하고요.



처음부터 철학 사조를 주워섬기려던 계획이었다면 이런 상대, 곧 열패감의 근인은 진즉에 사라졌겠지만, 철학적 사고라는 큰 틀에서 철학에 접근하려던 가없는 청운의 꿈이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점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철학이 전공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실타래가 제대로 꼬였다고 할까요? 일화를 소개합니다.



대학 '외국 문학' 강해에서 특정 용어를 분석해 보라는 교수의 말에 나름의 철학적 잣대로 대단히 진중하게 설명을 마쳤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교수 왈, “지금은 학생 생각이 아니라 그 분야 학자의 분석을 주워섬길 때입니다.” 한마디로 교우 앞에서 좋게 말하면 일침, 안 좋게 말하면 면박을 당한 셈이었죠.



당장은 화가 났습니다. 생각을 풀어내라고 시켜놓고는 교수가 기대하지 않은 혹평을 했으니까요. 수업이 끝난 뒤에, 그후로도 여러 날 교수의 말을 곱씹었습니다.





‘배워야 할 때는 두손 두발 다 들고 배우라는 것과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에는 특히 잠자코 듣는 훈련이 필요한 법’이라고 새겨들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격 아닌가 싶지만 말이죠. 여태 그 교수님의 의중은 듣지 못했으니 제게는 전설로 남아 있는 일화입니다.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가며 ‘남의 물’에 뛰어든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 물도 흥미롭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당시 전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다방면의 책을 읽은 게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정말로 고욕이었죠. 읽히지 않는 책, 장을 넘기면 직전 장의 내용이 암전되는 경험을 해본 분이시라면 제 심정을 이해하실 겁니다.



참기 힘든 고욕이라도 세월을 거치면 짜릿한 추억이 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물론 고욕의 강을 건너고 있다면 반대편에 도달할 날이 멀잖았음을 상기하시면 좋겠네요. 저 역시 그랬거든요. 그래서 인생은 살 만하다고들 입을 모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망각의 기제에 힘입어, 때론 반대편에 도달하는 식으로 고욕이 더이상 고역으로만 남지 않게 되니까요. 고욕의 높낮이가 다를 뿐 저마다 다 그 정도의 강을 건너고 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사실 전 어둑서니와 여러 판 겨루면서 값진 소득 몇가지를 얻었습니다. 예를 들면 무엇이든 나올 때까지 파보자, 라는 도전정신이 몰라보게 증강되었고요. 웬만해선 좌절하지 않는 강단이 길러진 것도 그 일환입니다. 분석력도 빼어놓을 수 없는 성적표겠네요.



그 통에 '철학은 쉽거나 재미있게 쓰기가 어렵다, 아니 쉽거나 재미있게 쓸 수 없다'는 단정적인 판단이 오랜 세월 제게 동무가 되었으니 이 정도면 천석고황이라고 할 밖에요. 지금은 그와 같은 판단에서 벗어났는데 이 책이 그런 경향에 기름을 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다못해 제위께서 “대체 못 말리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이 웃긴 철학책을 샀느냐?”, “읽어보니 재미있더냐?”라고 물으신다면 두말없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여기서 “같습니다”라는 애매한 표현을 쓴 데는 독자 중에는 제 말에 동의하지 않을 분이 계시리라는 생각에 나름 한 수 크게 접은 것이니 괘념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혹은 제 표현이 귀에 거슬리지 않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사설이 뭔가 궁색하거나 지지부진하고 대단히 멋쩍을 땐 이런 고어체-바라 마지체-가 적절한 쓰임새를 찾는 모양입니다. ^^





과연 재미있다는 판단은 비유하자면 만화를 볼 때 느끼는 감정(재미)과 일맥상통할까요? 풀어서 그것 한가지 또는 그와 유사한 것에서만 재미를 느끼는 걸까요? 전 재미의 층위와 결이 일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지적 갈증이나 결핍을 채워줄 때도 재미있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고 보고 있죠. 그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거고요. 앞서 양가감정의 하나로 든 “글의 함량이 기대 수준에 미달하다 보니까 제목이라도 그럴듯하게 꾸미려는 욕심이 지나쳐 산으로 간 결과가 그렇게 솔깃한 제목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라는 짐작을 기꺼이 기각할 책이라는 데 표를 던집니다.



이 책의 비기는 소개하고 넘어가야겠네요. 이 책에는 저자의 아들 두 명이 등장합니다. 대단히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아이들인데요. 벌써부터 놀랄 것 없습니다. 저자가 철학자라 아들도 그런가 보다고 지레짐작할 까닭 역시 없습니다. 그 또래 애들은 다 그런 식으로 사고한다는군요.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순치돼서 그렇지 아이들 말을 잘 들어보면 심오한 철학이 말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점을 저자가 흘려 듣지 않고 제대로 간파한 거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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