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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자본 카페와 스타벅스의 어떤 경우, 유럽 가는 길에서

감각적인 에세이에 휘청이다: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

by 콩코드


집 근처 카페,

오지OOZY다.



별별 일이 다 생기는 법이다. 때에 맞게 북적거리는 것도 좋지만 반대의 경우도 생각하기 마련이다. 어느 쪽이든 같은 양의 장과 단이 있게 마련이므로. 대부분 장단이 맞기를 바라지만 어디 그럴까.



추가 양쪽으로 기우뚱거리는 동안 몇 번 균형을 찾게 되는 법이지 않던가. 한순간이다. 그걸 못 알아채면 기회가 영 오지 않을 수 있다. 흘려보낸 균형의 시간이란 늘 당신에 관한 한 오지 않은 기회이므로.



일을 마치면

유럽으로 떠난다. 1년만 있다 돌아오기로 했다. 당장은 파리에서 한 두어 달 살 계획이다. 벌써 여러날, 여러 번 책방에서 제인 페이크의 《파리에서 살아보기》를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했었다.



《파리에서 살아보기》는

2011년에 출간된 책이라 헌책방에선 흠이 덜한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책방 서가를 훑다 문득 이 책이 서가에 두 권이 꽂혀 있는 낯선 장면에 눈이 번쩍 뜨였다.



다른 한 권의 보전 상태가 새책만큼 좋았다. 집 구하기와 파리에서 지켜야 할 예절, 현지인들의 시각에 맞춘 파리의 일상 등 파리에 살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로 가득하다. 알맞춤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임을 실감한다. 버릇처럼 아껴 읽고 있다.



우려했던 바가 없던 건 아니다. 출간 시점이 오래돼 시의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두 번째는 2015년에 한국에 처음 번역된 뒤로 재판을 거듭했는지가 확실치 않았다. 구입한 책은 초판 번역본이다.



믿는 구석은 있었다. 사람들의 정서와 마을 분위기가 쉽게 바뀌진 않으리라는 것과 여러 사람에게 꽃히는 것보다 내 필요에 닿는 책인가라는 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생경한 문제에 맞닥뜨려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보다 지난날 내린 제법 훌륭한 결정을 상기하지 못해 패착을 두는 경우가 훨씬 많다. 경험상 그렇다는 거다. 지난 경험치를 몇 번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도.



돌아보면 손에 넣어야 할 책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떤 책은 그 시기에 읽지 않으면 시의성이 떨어져 보충할 다른 책과 함께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럴 땐 차라리 유사한 주제의 다른 신간을 읽는 편이 낫다.



시의성이 변수가 아니라면 같은 전제에서 대중적 선호 여부도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단순히 대중적 호오가 문제라면 베스트셀러를 찾으면 될 일이지만 알맹이 없이 출판사에서 대규모 프로모션으로 기획한 베스터셀러가 적잖은 현실이 가로막는다.



그런 책을 덥썩 물었다가는 라면 냄비 밑받침용으로 쓰이기 딱 좋다. 방안 구석을 천덕꾸러기처럼 쏘다니다 소리소문없이 쓰레기더미에 처박힐 운명의 책이 되기도 하다.



다행히 《파리에서 살아보기》는 시의성에 구애받지 않있다. 대중적 선호를 대신할 강력한 사적 필요도 갖췄다.





두 시간째 커피숍이다. 미안해서라도 일어서야겠다. 나머지 두 권의 책에 대한 인상은 자리를 옮겨 적는다.



두 블럭을 걸었다. 명절이라 딱히 문을 연 데가 없다. 집을 너서며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소자본 커피숍 두 군 데를 도는 게 훨씬 저렴하고 분위기 전환에도 좋겠다.



그렇게 먼저 찾은 소자본 커피숍에서 한 시간이 지나고부터 엉덩이가 들썩거리더라는 것. 이유는 앞서 말했다. 밖은 찼다. 또다른 소자본 커피숍을 찾느니 규모가 큰 커피숍이 낫겠다 싶었다. 머무는 시간을 좀 지체하더라도 덜 미안한 곳에서 스타벅스가 앞섰다. 경제적으로 손해가 나는 결정을 단행할(!) 때도 있다.



두 번째 책이다.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다. 열린책들에서 편집이사를 지낸 김영준이 썼다. 이력에 오른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가 그의 첫 에세이다, 라는 표현에 주춤했었다. 위험 부담을 감수해, 말아?



참고하시라. 어떤 책이 작가의 첫번 째 에세이집이라면, 더욱이 그 책 말고는 번역서 한 권을 낸 게 전부라면 그 에세이, 수작이거나 졸작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평작인 경우도 물론 있다. 대부분 독자라면 평작을 기대하고 에세이를 사서 읽지는 않는다.



수작일까? 졸작일까? 갈팡질팡할 때 최선의 판단 기준은 일단 자리에 앉아 목차에서 두어 편을 찾아 읽는 것. 그럴 시간이 없다면 믿을 만한 출판사에서 냈는지를 참고하면 그럭저럭 위기를 면한다. 믿고 보는 작가라면 고심의 기로에 설 하등의 이유가 없다.



두 장이 거의 안 되거나 두 장을 겨우 넘는 분량의 에세이마다 읽는 맛과 호기심이 강렬하게 꽂힌다. 다음 편에 대한 기대가 휘몰아쳐 작정하고 책을 내려놓지 않으면 허망하게도 한 시간만에 책장 끝을 볼 심산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그럴 순 없어서 단 두 편만 읽고 덮었다. 작가의 이름을 전두엽 중앙에 깊숙히 꽂아 넣었다. 근래 보기 드문 에세이라는 찬사와 함께.



에세이가 소설처럼 읽힌다는 건 작가의 확실한 강점이다. 두어 장 정도의 분량에서 전중후의 스토리가 감각되는 건 천부적인 재능이다. 열패감을 맛보는 순간이지만 좌절은 섣부르다. 배우고 익혀서 도달하지 못할 언덕이란 없다고 믿는다. 아직은 거기까지. 열패감과 황홀한 기분은 내게 등가다. 거인의 어깨 위로 등정하는 기분은 거듭 황홀하다.



세번 째 책을 소개해야 하는데 영화 대사처럼 벌써 많이 먹었다. 몹쓸(번역하면, 아주 만족한) 동곤증 탓에 다음 회를 기약한다. 소개할 책은 에이미 스탠리의 《에도로 가는 길》이다. 명민한 독자라면 엄지부터 치켜들었을 터다.



《에도로 가는 길》의 한 구절을 덧붙인다. 보모가 쓰네노를 업고 구슬픈 민요를 불러주었고, 아기는 어깨 너머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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