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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이야기] 전파사 진열장에 매달린 사연

브라운관 티브이와 김일의 프로 레슬링에 관한 추억

by 콩코드


그 시절엔 동네마다 전파사가 있었습니다. 전파사에서 가전제품을 팔았는데 신통치 않았습니다. 가전제품을 들여놓을 만큼 풍족한 가정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전파사에서 철마다 신규 가전제품을 진열하는 경우가 거의 없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자구책이었을까? 아니면 아름아름 돕다 보니까 업종으로 굳어진 걸까?



가전제품이 더는 손쓸 방법이 없을 때 동네 주민들은 고장 난 제품을 전파사로 가져가곤 했습니다. 보통은 전파사 주인이 2,3시간 안으로 고쳐서 돌려보내는데, 어느 건 2,3일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치는 시간을 기준으로 기술자냐, 엉터리냐로 갈리는 판도였으니 전파사 주인은 어떻게든 2,3시간 안에 고장 난 가전을 고치려 했습니다.





전파사 윈도우

평판이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했느냐면 대부분 1시간 안에 수리를 순삭하던 전파사가 이사하고 그 자리에 다른 전파사 간판이 걸렸습니다. 새로 연 전파사는 서너 달 버티는가 싶더니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수리 시간이 반나절을 훌쩍 넘기고 전에는 공짜였던 고장조차 야박하게 수리비를 받았으니 동네 인심이 뚝 끊기고 말았습니다.



- 기술은 형편없는데 돈만 밝혀.

- 소문이 나면 그걸로 끝장인데, 어쩌나?



수리비는 일정치 않았습니다. 가벼운 고장은 무료로 고쳐주거나 실비를 받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값비싼 제품엔 고가의 수리비를 물렸습니다. 한우식당에서 싼값의 점심 메뉴를 미끼로 저녁 손님을 끌어들이는 전략과 흡사한 광경입니다. 계산속보다는 동네 인심을 얻으려는 분위기가 더 강했던 시절이긴 합니다만 수리비 구조는 내내 그런 방식으로 흘러갔습니다.



실제로도 가정에서 전파사로 고장 난 가전제품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더니 안 나오던 티브이가 나온다는 경험이 가가호호 유통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옥상에 설치한 티브이 안테나의 방향을 몇 번 트는 것만으로도 티브이 화면이 제대로 나오는 경우가 꽤 되었습니다. 티브이 화면에 지지직 소리가 나며 연이어 줄이 지나가거나 화면 자체가 까맣게 변하면 식구 중 한 명이 옥상에 오르곤 했습니다.



티브이 옆부분을 툭툭 치는 것만으로도 티브이가 잘 나올 만큼 전파환경이 좋지 못한 때라 벌어진 촌극입니다만, 그렇게라도 몇 번 고쳐본(?) 경험이 있는 가족 구성원은 ‘우리집 기술자’라는 왕관을 기꺼이 썼습니다.



당시엔 수리비 흥정도 가능했습니다.



- 3천원이라구요? 지난번에 2천원에 했어요.

- 그럼 2,000원만 주세요.



전파사 주인과 안면을 튼 가장들은 퇴근길에 전파사에 들러 주인과 술 한잔을 나누거나 저녁을 먹고는 마실 가듯 전파사에 들르는 것도 그 시절의 무겁지 않은 풍속도였습니다. 몇 번 수리를 거치며 안면을 트자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듯 서로 살갑게 지내던 풍경도 삼삼하게 떠오릅니다.



아버지와 전파사 주인이 안면이 생기면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전파사는 보통 네거리에서 잘 보이는 곳에 티브이를 진열했는데 전파사에선 특별한 날에만 티브이를 켰습니다. 그런 날이면 동네 아이들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른 채 전파사로 달려갔습니다. 윈도우에 바짝 몸을 대고 까치발을 들어야 하는 고충은 둘째치더라도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김일 프로 레슬링

전파사 윈도우 앞에 아이들이 장사진을 친 날, 그날은 어김없이 프로 레슬링이 방영되었습니다. 당시 프로 레슬링 경기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대부분 김일 선수가 경기의 피날레를 장식했습니다. 걸출한 스타로 요즘은 손흥민이나 오타니 등이 입길에 오릅니다만 김일 선수의 그 시절 인기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김일의 프로 레슬링이 방영되는 날이면 거리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귀가를 서둘렀고 저녁 식사마저 평소보다 빨리 해치웠습니다.



7시 정각. 티브이 앞에 모여 화면에 코를 박던 사람들은 경기 내내 환호성과 장탄식을 올렸고 혹 지나가던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기 바빴습니다. 하물며 집 나간 강아지와 고양이들마저 집구석을 찾아들었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곤 했으니.



아버지가 전파사 주인과 안면을 튼 덕에 주인은 제게 적잖은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제게만은 윈도우 밖에서 티브이를 볼 권리를 주었습니다. 더불어 데리고 오는 친구 한 명에게도 말입니다. 집마다 티브이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 좋아하는 프로 레슬링 경기를 보려면 전파사로 가야했습니다. 아니면 티브이가 있는 동네 친구 집에 가야했는데, 그건 눈치가 많이 보였습니다. 부모님은 한사코 폐를 끼치면서까지 티브이를 보러 친구집에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곤 하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카드가 전파사였던 탓에 전 호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레슬링 경기가 1시간이라면 30분 먼저 윈도우에서 물러나기. 같이 간 친구에게도 단단히 일러두기. 윈도우에 너무 바짝 몸을 기대지 않기. 전파사 주인이 신경을 덜 쓰도록 노력에 노력을 기울인 것도 잠시, 소문을 들은 아이들이 전파사 앞으로 몰려들어 전파사를 전부 가리자 급기야 부아가 난 주인이 성큼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 불쌍해서 자리를 내줬더니 안 되겠다.

- 다들 썩 물러나라.



거기서 한두 번 경기를 본 게 고작인데 화려한 날은 그날로 끝이 났습니다. 시무룩해서 집에 들어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아버지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며칠 후, 브라운관 앞에 문이 달린 고급 티브이가 안방 목좋은 곳에 자리를 잡는 경악할 만한 일이 있었고, 그 뒤로 친구들이 레슬링 경기를 보러 우리집에 놀러 오곤 하던 때를 쏜살같이 지나 그날 전파사 윈도우에 매달려서라도 티브이를 보려던 열정은 점차 심드렁해갔습니다. 티브이가 희귀했던 시절의 단편이 그렇게 막을 내리고 았었습니다.



아듀~ 우리들의 프로 레슬링, 요술 상자와도 같았던 브라운관 티브이.



사진 출처, 블로거 보물섬님, 조선일보, 제주어뭉라이프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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