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생선과 닭고기를 먹지 못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날,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때가 아닐까, 싶다. 당시 우리 집은 서울 쌍문동 산비탈 아래에 있었다. 산비탈은 제법 큰길을 끼고 있었고 좌우로 난 길은 아이들에게 마당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거기서 철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깡통을 돌리거나 자 치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더러는 사람을 모아 축구를 하기도 했지만, 지나가는 어른들이 사람 다친다며 호통을 치는 통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주로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오징어 게임’을 했다. 우리는 그 게임을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오징어 이상’이라고 불렀다.
큰길에서 남쪽으로 20미터쯤 이르면 언덕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둔덕이 버티고 섰다. 둔덕을 넘으면 멀리 지붕에 하얀 슬레이트를 얹은 단독주택이 반갑게 맞았다. 거기서 나와 할머니, 부모님, 동생이 살았다. 집은 도로에 면한 문간방과 안채로 구성되었는데, 문간방은 세를 주었고 방 셋을 갖춘 안채에서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나와 동생이 각각 둥지를 틀었다.
서울 변두리의 특별한 것 없는 동네는 밥짓는 소리로 굴뚝이 설설 끓는 저녁 무렵을 제외하면 조용했다. 심심할 때면 남북으로 난 개천 구경을 나갔다. 개천은 집에서 5분 거리에 있었다. 물이 많고 물살이 세서 구경하는 맛이 났다. 개천 위로 폭 4미터의 콘크리트 다리를 엉성하게 놓았다. 다리엔 난간이 없어 어른들만 자전거를 타고 건넜을 뿐 아이들은 세발자전거라도 손에 끌고 다리를 건넜다. 다리 높이는 3미터를 겨우 넘었다. 여름 장마철에 물이 붇기라도 하면 낮고 조악한 다리는 속수무책으로 물에 잠겼다. 자주 범람하지는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언제 물이 넘칠지 몰라 촉각을 곤두세웠다.
도시의 경계 바깥에서 거인들이 숨을 불어넣으면 음습한 바람이 불고 천상의 구름에는 신들이 주사위 놀이를 하며 태어날 생명과 죽어 가는 운명들을 점치는 도시, 가끔씩 지상의 사람들이 황금빛 화살을 쏘아 올리면 무수한 별들이 거인의 숨소리에 떠밀려 내려와 나무와 풀잎에 이슬로 맺히고 시도 때도 없이 말들과 양들이 날개를 달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비현실적인 도시. ..... 《천사들의 도시》 중에서
그날 새벽 아버지는 서둘러 개천으로 향했다. 한참 뒤 근심어린 표정으로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아무래도 물이 넘칠 것 같다고 물 퍼낼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말했다. 이른 아침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떠지지 않은 눈을 비비며 마루로 나오자마자 기겁했다. 당장에라도 집어삼킬 듯이 시커먼 물이 미루 밑이서 찰랑거렸다. 역겨운 냄새가 났다. 그렇게 초등학교 6년 동안 두어 번 집이 침수되었다. 그때마다 나와 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집에 그득한 물을 퍼 나르느라 한참 부산을 떨어야 했다.
며칠 뒤 상 위에 닭고기와 수박이 올랐다. 몹시 놀라 얼굴빛이 변했다. 그 시절만 해도 닭고기나 수박은 자주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귀한 음식이 두 개나 한 상에 오르다니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많이 먹을 욕심에 수박과 닭고기를 함께 욱여넣다가 탈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기도가 막혔다. 숨을 쉬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걸 본 어머니가 내 입에 손을 넣고 음식물을 빼내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날 후로 수박이나 닭고기만 보면 목구멍에서 냄새가 배어 올라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생선은 일에 연루되지 않았음에도 수박, 닭고기와 함께 기피 품목에 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수박 등속에겨우 손을 댔다. 장장 18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7년이 흘러 군 소집명령을 받고 훈련소에 입소한 다음 날 저녁 난 다시 한 번 닭고기에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통닭이었던 점만 다를 뿐 닭고기에 얽힌 내 인생의 비사가 재현되는 줄 알았다. 또다시 닭에 치여서 다시 18년 동안 입에도 못대지 않을까 기겁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것도 그 맛있는 통닭에 대해서 말이다.
군에 입소한 날 난 향도로 뽑혔다. 첫날 훈련생을 인도한 것에 흠집을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소대장과 중대장에세 칭찬을 들었다. 운명의 둘째날. 훈련을 끝내고 십 수 개의 소대가 연병장에 모였다. 그 즈음 해가 서산에 걸렸다. 분열식을 마치면 저녁 배식을 받으러 가면 되었다. 경례를 받은 훈련소장이 해산을 외쳤다. 곧 난 돌아서서 소대원들을 향해 어느 때보다 낭랑한 목소리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소대원들이 식당으로 내달렸다.
이쯤에서 다른 소대원들이 따라붙어야 하는데 그들은 마치 붙박이라도 된 듯이 연병장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아차 싶었던 순간 소대장이 우리 소대원에게 '연병장에 집합' 구령을 내렸다. 거기서 나와 우리 소대원들은 소대장에게 일장 훈계를 들어야 했다. 얼차례도 받았다. 대가로 맨 나중에 연병장을 떠난 우리 소대가 식당에 당도했을 때는 밥과 반찬이 모두 떨어지고 없었다.
여기서도 장장, 그놈의 장장이 1시간을 넘기고서야 배식을 받는데 계급장 2개를 단 취사병이 하는 말, 미안해서 통닭을 했으니 마음껏 먹어라. 그날도 어김 없 입이 터져라 음식을 우겨넣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먹고나서야 수저를 놓았다. 막사에 돌아오고 먹은 음식이 부푸는 느낌이 든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어서 이 위기가 지나가기만 바랐다. 혹 쓰러지기라도 하면 난감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닭고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평생 따라다닐 테고, 소대원들에게는 얼마나 미련하게 먹었으면 숨도 못 쉬게 되었느냐는 핀잔을 들을 게 뻔했다. 사정을 용케 눈치 챈 소대원 중 한 명이 다가와 등을 쳐주며 내가 심호흡을 크게 할 수 있게 도왔다. 그렇게 난 또 한 번의 악몽에서 벗어났다. 5년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