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 책을 어찌하오리까.

by 콩코드


책은 어느 정도 읽어보고 사지 않으면 후회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번역투 문장의 책일 경우일 텐데요. 가독성을 심각하게 떨어뜨릴 정도로 비문이 심한 책, 감당이 될까요? 대부분 1. 이해될 때까지 읽는다. 2. 읽지 않고 팽개쳐둔다. 3. 책을 반환하고 돈을 돌려받는다,라는 세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백번 읽으면 뜻을 새길 수 있다는 말을 신줏단지 모시듯 활용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거의 방송에 나오지 않지만, 전에는 옛 서당을 재현한 스튜디오에서 대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학동들이 "하늘천따지 감을 현 누를 황"을 소리 높여 합창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뜻을 몰라도 저렇게 소리 내어 읽으면 이해가 될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는데, 지금도 그 장면은 특정 상황을 희화화한 것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채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오랜 세월 공부한 사람이라면 문장에 얼마간 오류가 있어도 평소 쌓은 지식으로 문장을 재배열하거나 유추하는 식으로 독해를 시도할 수 있겠습니다만 글쎄요, 아이들에게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공부하는 내내 학동들이 다리를 비비 꼬거나 몰래 도망치는 일이 허다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겠지요.



위 1번처럼 이해될 때까지 읽으려면 얼마만 한 인내심이 요구됐을까요? 아마도 비문투성이의 문장이라면 앞으로 나가는 데 상당한 진통이 뒤따를 겁니다. 흥미를 잃는 건 시간문제고요. 눈살을 찌푸리며 문장 하나하나, 문단 서너 개에 몰두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배겨 날 장사가 없습니다. 냅다 던져버리지 싶은 마음이 들면 사실 덮는 게 답일 수 있습니다. 인내심이 고갈되면 그땐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자체 발광 아우라로 당장 원서를 찾아 읽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직 원서가 국내로 들어오지 않았거나 영어 외의 언어로 쓰였다면 어쩔 수 없이 번역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번역서를 읽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 집중력은 효자노릇을 톡톡히 합니다. 두뇌를 풀가동하게 만드는 동력이 집중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때가 되면 뇌가 몰라보게 활성화되는데요. 그 결과로 연관 지식을 불러와 문장을 너끈히 해독하거나 불현듯 떠오른 단어 하나가 독해 과정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한 권을 독파하려면 전에 비할 바 없는 난항이 예상되고 기어코 작파하는 일도 허다합니다만 독파 후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오늘 제가 맞닥뜨린 난제가 위 상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난제의 주인공은 일본 사회학의 태두가 인생 막바지에 쓴 책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한 몸에 모은 《현대사회는 어디로 가나》입니다. 현대사화의 속살에 관한 내밀한 진단과 불운하지만은 않은 미래 전망을 담지 않았을까 마음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번역을 많이 해 본 경험이 없거나 글을 쓰는 데 능수능란하지 못한 분이 번역한 듯합니다. 한 장 건너서가 아니라 한 줄 빠짐없이 등장하는 번역투 문장에 턱턱 가로막히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200쪽 안쪽의 분량이라 망정이지 그 이상이었으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전문 번역가들이 거의 없던 시절에 대학을 다닌 터라 이런 상황에 워낙 이골이 나있기는 합니다만 요즘은 거의 사라진 풍속도여서 혼란이 극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책에 관한 리뷰를 혹 제 블로그에서 발견할 때쯤이면 제게도 얼마간 추억으로 남기는 하겠지요. 설마 그럴까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차라리 반품하세요,라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책방에서 제법 싼 가격에 구입한 책이고, 없는 시간을 쪼개 쓰느라 충분히 읽어보지 못하고 구입한 제 탓도 있어 그렇게 하지 못하겠더군요. 앞서 언급한 대로 분량이 적어 읽어내지 못하겠느냐 호기를 부렸는데 지금으로선 지나치게 섣불리 판단했다는 자책이 앞섭니다. 이 것 말고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데 싶은 심정 말이죠.



그나마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상황에 많이 익숙해졌다는 겁니다. 번역투 문장을 하루 꼬박 읽던 시절의 느낌도 살아나서 나름 위안 삼고 있습니다. 불과 예닐곱 장을 읽은 뒤끝이라 간단히나마 내용을 소개할 건더기가 없는 부분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어를 할 줄 았았으면 진즉에 원서를 구했을 텐데 싶은 마음이 가시지 않네요.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정신 건강을 위해서 위 2번과 3번을 추천합니다.



출판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번역가님들 부탁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번역에 조금 더 신경 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