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에서 벗어날 때 달리 보이는 것들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책은 피사체(被/寫體)를 내가 모르는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하늘 위에서가 아니라 건물 옆에서, 지하에서, 건물 뒤에서, 아주 멀리서. 혹은 나와 완전히 다른 배경에 있는 사람이 찍은 것이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없다. 즉 피사체, 문제 대상(사회)을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그 안에 있으면 자신을 알 수 없다. 교회의 문제점은 교회 안에서는 볼 수 없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외부에서만 보인다. 사회 밖, 틀 밖, 궤도 밖에 서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 《정희진처럼 읽기》, 정희진
조감도로 전체를 볼 수 있다. 그 '전체'가 우리가 아는 전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하늘에서 새가 날면서 본 모습이 세상 전체일 리 없다. 이는 마치 경제학이 합리적 경제인 가설이라는 전제 하에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세상 모든 사람이 매사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거나 결정하지는 않는다. 대단히 합리적인 인간도 어떤 경우든 합리적이지만 않다. 다 구멍이 있고 허들이 있는 것이다. 사실상 세상 전부를 볼 수 있으려면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전체를 한눈에 보려는 조감도는 욕망에 불과하다고 정희진은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수준에서, 그 한계 내에서 세상을 볼(이해할, 엄밀히 말하면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정희진은 전제부터 온전하지 않으므로 결국은 충족되지 않을 욕망에 분투하기보다 다른 방법을 찾자고 제안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려던 데서 좌우에서 지켜보고 혹은 뒤에서 유심히 관찰하자는 것이다.
다른 시각, 관점의 변화, 혹은 대상을 낯설게 보려는 일단의 노력이 대상의 진실한 속살에 직면하는 의외의 소득을 가능케 한다. 위에서 아래로만 내려다보려는 욕망, 그 구도, 고집, 오해에서 탈피할 때 마주하는 세상, 세계관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수건을 벗어던지면 좀 더 많은 얼굴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