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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아우슈비츠 - 죽음을 소비하는 시대

프리모 레비를 다시 읽는다

by 콩코드


증언의 목소리, 살아남은 자의 윤리


프리모 레비는 살아 돌아왔다. 수백만 명의 목숨이 꺼져간 아우슈비츠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말해야 했다. 그 말은, 단지 기록이나 회고의 언어가 아니라 ‘증언’이라는 윤리적 행위였다. 그는 단지 자신이 본 것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 비인간의 체제를 통과할 수 있었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제목은 질문이다. 선언이 아니라, 되묻는 외침이다. 레비는 그곳에서 인간이 어떻게 파괴되고, 말이 사라지고, 윤리가 붕괴되는지를 설명했다. 아우슈비츠는 단순한 ‘수용소’가 아니었다. 인간됨의 마지막 선이 허물어진 실험실이었고, 말과 기억과 정체성의 부재 속에서 완전한 객체가 된 인간을 만들어낸 공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어떻게 그리도 많은 이들이 ‘그저 맡은 역할을 했을 뿐’이라며 침묵했는지에 대해서, 세상은 불편해했다. 그러므로 레비는 고통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말할 수 없음’ 자체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받는 것은 죽은 유대인뿐이다


데어라 혼은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에서 통렬한 문장을 남긴다. “우리는 이제 살아 있는 유대인을 싫어하고, 죽은 유대인을 애도한다.” 이것은 단지 유대인 문제를 넘어서, 기억과 고통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고발이다.


죽음은 연민을 자극하지만, 살아 있는 고통은 불편함을 만든다. 살아 있는 고통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


레비가 그토록 강하게 증언을 고집했던 것은, 아우슈비츠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 믿음은 레비에게 저주의 말이 아니라, 윤리적 의무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문학의 언어를 통해 “다시는”이라는 맹세가 공허해지지 않도록 싸웠다.


그러나 세상은 살아남은 유대인의 말보다, 죽은 유대인의 이미지를 더 사랑했다. 비극은 추모의 대상이 되었지만, 경고는 피로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왜 고통을 소비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다큐멘터리, 영화, 드라마, 소설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본다’. 하지만 그것을 산다는 것, 즉 그 고통을 자신의 현실 속 윤리로 바꾸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레비는 단지 수용소 안의 일이 아니라, 수용소를 가능하게 만든 사회 전체의 공모를 말했지만, 우리는 그 비판을 관람한다.


기억은 윤리적 행위다. 그러나 오늘날 기억은 때로 ‘윤리적 소비재’가 되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역사에서 감동을 추출하고, 연민을 느낀 뒤 자기 위안의 정서로 되돌아간다.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는, 그런 위안 앞에 불편한 진실로 작용한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다시 말할 수 없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가? 누군가의 증언은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의 아우슈비츠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는가?


‘기억’이라는 정치, ‘윤리’라는 감각


기억은 중립적이지 않다. 무엇을 기억할지, 누구의 고통을 말할지, 어떤 이름을 반복할지는 모두 정치적 선택이다. 레비가 “중립은 없다”고 말했듯, 침묵 또한 하나의 태도이며, 비겁한 협조가 된다.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분노하면서도, 너무 쉽게 망각한다. 고통은 뉴스 속 이미지로 스쳐 지나가고, 증언은 클릭 몇 번으로 닫힌다. 정보는 넘치지만, 감각은 마비되어 간다.


레비가 증언을 문학으로 바꾸려 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문학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고통의 주체로 만드는 장르다. 독자는 수용소 안에 들어가야 했고, 그곳의 냄새와 공기, 침묵과 눈빛을 감각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프리모 레비를 다시 읽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는 고통을 말하는 방법을 잃어가고 있다. 증언은 점점 스펙터클로 전락하고 있고, 진실은 감정을 자극한 후 사라진다.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한다. 기억한다는 것, 말한다는 것, 읽는다는 것이 어떤 윤리를 요청하는지.


다시 레비를 읽는다는 것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이 야만’이라 말한 아도르노의 시대는, 이제 사라졌다. 우리는 다시 쓰고, 다시 말하고, 다시 물어야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간은 계속해서 인간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유대인을 사랑하는 대신,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들의 고통에 반응해야 한다. 우리가 듣고 외면했던 모든 ‘불편한 진실’에 응답해야 한다.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인간됨의 첫걸음이다.” 그 말은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문장이다. 잊히지 않도록.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억은 오늘을 위한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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