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다는 건 누가 정했을까? – 시대별 미의 심리학

밀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인스타그램 필터까지

by 안녕 콩코드


프롤로그: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사기극


한때는 풍만함이 건강함이었고, 건강함이 곧 아름다움이었다. 그래서 볼록한 배와 튼튼한 허벅지를 지닌 조각상이 '여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이상하리만치 도톰한 입술, 비현실적으로 또렷한 턱선, 그리고 갈비뼈가 드러나야 '핫하다'고들 말한다.


이쯤 되면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는 정말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 심어놓은 ‘기이한 기준’을 쫓고 있는 걸까?


글은 그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시대마다 다르게 규정되어 온 미의 기준,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인간 심리. 유쾌하게, 때로는 씁쓸하게 파헤쳐보자.


밀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왜 뚱뚱했을까?


일단 외모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 약 2만 5천 년 전의 밀렌도르프 비너스는 풍만함의 끝판왕이다. 볼록한 배, 크고 무거워 보이는 가슴, 얼굴이라고 하기엔 심플한 머리. 오늘날 인스타그램에 올렸다면? 아마 ‘비포 사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시엔 이게 ‘핫’했다. 왜냐고?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통통하다는 건 먹을 게 있다는 뜻이었고, 생식능력도 있다는 뜻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건강보험이 철통 같고 대출 없이 내 집 마련한 사람" 같은 느낌이다.


즉, 그 시절의 ‘미’는 생존 전략이었다. 인류는 그렇게 실용적이었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 먼저 따졌던 건 혈색, 지방량, 그리고 출산력.


르네상스의 볼륨감: 통통한 게 귀족의 미덕이었다지


르네상스 시대 미녀도 통통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보면 지금 기준으로는 다소 무른 몸매지만, 그 시대엔 그게 고급이었다. 왜냐? 다이어트는 평민이나 하는 거였다. 귀족은 먹고 마시며 여유로운 삶을 즐겼고, 그게 몸에 드러났다.


오늘날로 치면 "플렉스" 같은 거다. 차 뽑고 명품 사듯이, 몸으로도 사회적 지위를 드러냈던 시대. 뱃살은 일종의 벤츠였고, 넓은 엉덩이는 금 수저의 상징이었다.


웃픈 사실 하나. 그 시대 초상화를 보면 인위적으로 창백하게 피부를 칠했다. 말라리아에 걸린 것도 아닌데 왜? 백색은 고귀함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일광욕은 농부나 하는 거지, 귀족은 실내에서 음악이나 듣는다고 믿었으니까. 뭐든 너무 가면 결국 웃기다.



20세기의 롤러코스터: 플래퍼에서 슈퍼모델까지


1920년대. 여자들이 갑자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담배를 들기 시작했다. 코르셋을 벗고 플래퍼 드레스를 입으며 외쳤다. “우린 이제 새로운 여자야!” 이때 미의 기준은 납작한 가슴과 남성적인 체형. 왜? 기존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또 얼마 안 가 미의 기준은 다시 요동친다. 50년대엔 마릴린 먼로처럼 곡선미 넘치는 몸이 유행하고, 90년대엔 케이트 모스처럼 말라깽이 ‘헤로인 시크’가 유행했다.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휘둘리는가? 한 세기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볼륨"과 "가녀림"을 왔다 갔다. 그때마다 여성들은 몸을 바꾸기 위해 애썼고, 사회는 ‘그게 멋’이라며 부추겼다.


미의 기준이란 결국 ‘지배적인 문화의 이상향’을 보여주는 셀카 같았다. 그리고 그 필터는 매번 달라졌다.


입술은 왜 풍선처럼 부풀었는가


인스타그램을 켜보자. 똑같은 얼굴이 도배되어 있다. 뾰족한 턱, 두꺼운 입술, 치켜 올라간 눈꼬리. 왜 이렇게 다들 비슷할까? 이쯤 되면 ‘유행’이라기보다 ‘규격품’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입술은 특히 극적이다. 마치 바람 넣은 풍선처럼 부풀려야 ‘섹시하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이건 유전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다. 순전히 ‘기준’이다. 한때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이 전설이 되더니, 이제는 필러 주입으로 카피 가능해진 시대.


여기엔 SNS 심리학이 숨어 있다. ‘좋아요’는 새로운 통화이고, 사람들은 더 많은 클릭을 위해 자신을 조각한다. 웃픈 현실은, 현실 세계보다 SNS에서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내 실제 얼굴이 내 프로필 사진을 못 이긴다”고 농담한다.


우리는 왜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문제는 ‘남의 기준’을 내 기준으로 착각하면서 시작된다. 남들이 좋아하는 걸 나도 좋아해야 할 것 같고,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뒤처진 것 같다. 그래서 바지 핏 하나 바뀌면 옷장을 다 버리고, 눈썹 유행이 바뀌면 얼굴이 낯설어진다.


미는 원래 주관적인 감각이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회가 미를 자본화하고, 그걸 따라가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든다. 화장은 ‘자기표현’이 아니라 ‘자기 방어’가 되었다.


가장 슬픈 건, 사람들은 자기 몸을 미워하면서도 그걸 고치는 데 돈을 쓰고, 그 돈을 버느라 다시 자신을 갈아 넣는다는 점이다. 아름다움은 기쁨이 아니라 프로젝트가 되었다.


내 몸은 나의 것인가, 타인의 시선에 속한 것인가


여기서 질문 하나. "나는 내 몸을 얼마나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내 몸을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라고 바꿔보자.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너무 많은 기준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아름다움은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유행은 소모되고, 진짜는 남는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자기 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를 갖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대적인 아름다움 아닐까?


“아름다워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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